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듀나의 배우스케치
[듀나의 배우스케치] 박신양

전 <파리의 연인>도 안 봤고 <쩐의 전쟁>도 안 봤습니다. 다시 말해 박신양이라는 스타의 경력을 제대로 평가할 입장이 아니라는 거죠. 저에게 박신양은 <범죄의 재구성>이나 <4인용 식탁>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 장르 전문배우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어요. 좀더 인기있는 <편지>나 <약속>은 단 한번도 진지하게 자리를 잡고 본 적이 없으니 뭐라고는 못하겠고. 아무래도 전 박신양을 멜로드라마 배우로 본 적이 없나 봅니다. 적어도 그가 선택하는 멜로영화들이 제 취향이 아닌 것이겠죠.

<바람의 화원>을 보기 시작했을 때 전 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그의 연기를 보는 게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텔레비전 시리즈는 혼자 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 해도 사방에서 온갖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게다가 거의 완벽하게 신윤복 캐릭터에 적응한 문근영과는 달리 비판도 셉니다. 지금도 전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과 비교해 그와 송일국을 까는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는 중이죠.

그래도 전 궁금해집니다. 과연 <바람의 화원>에서 보여주는 박신양의 연기는 <쩐의 전쟁>이나 <파리의 연인>을 보고 나서 볼 때와 보지 않고 볼 때가 다른가? 다르면 얼마나 다른 거지?

<바람의 화원>에서 그가 보여주는 김홍도 연기에 걸리는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그는 정통사극의 테크닉을 보여줄 때 많이 약합니다. 드라마의 김홍도는 이미 궁중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베테랑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왕 앞에서나 다른 신하들 앞에서 서툴기 그지없어요. 일부러 규율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확신이 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정조 역을 하는 배수빈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더 분명해집니다. 경험문제가 아닌가 생각해요. 사극이란 그냥 아무렇게나 시작해도 되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의 다른 연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저는 그가 일상적인 현대극의 대사로 사극을 하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우리는 18세기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아는 바가 없으며 당시의 언어와 동작을 그대로 재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걸 고려한다면 배수빈의 좀더 정통적인 왕 연기나 박신양의 김홍도 연기는 큰 차이가 없어요. 여전히 궁중장면은 거슬리지만 그가 문근영과 함께 다소 나사가 풀어진 스승 역을 연기할 때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배우 궁합도 맞는 편이며 (여전히 ‘사제라인’을 생각하면 오싹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감정 표현도 좋고 특히 코미디에 뛰어납니다. 원작의 김홍도는 이보다 더 심각한 사람이지만 문근영이 자기만의 신윤복을 만들었다면 박신양이라고 자기만의 김홍도를 연기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

하지만 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연기 매너리즘은 그의 경력을 따라온 시청자에겐 방해가 됩니다. 전 얼마 전 인터넷에서 어느 외국 시청자와 함께 이 프로그램과 박신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박신양이 …에서 보여준 이 연기는 <쩐의 전쟁>(또는 <파리의 연인>)과 똑같아!”라는 반박을 몇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는 주객이 전도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죠.

저에겐 이런 상황에서 대처할 기성품 반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케리 그랜트나 오드리 헵번 같은 배우들은 어쩌고?” 맞는 말이죠. 자신의 고정된 매너리즘을 고수하면서 평생을 스타로 보낸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전 이 고정된 반박을 제시할 수 없어요. <파리의 연인>이나 <쩐의 전쟁>을 보지 않는 한, 특정 매너리즘이 특정 상황에서 반복될 때 시청자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관련인물

일러스트레이션 임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