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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제임스 본드 영화로의 복귀 <007 퀀텀 오브 솔러스>
김도훈 2008-11-05

액션 쾌감 지수 ★★★★ 전통 복귀 지수 ★★★★ 본드 섹시 지수 ★★★★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재부팅했다. 그런데 이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역사서를 참고해보시라. 이미 제작사 EON 프로덕션은 조지 레젠비의 <여왕폐하 대작전>으로 본드를 재탄생시킨 바 있다. 액션은 당대 무협영화의 영향으로 더욱 빨라졌고 심지어 본드는 사랑에 빠진 채 MI6를 떠나는 비극의 히어로로 거듭났다(데자뷔!). 또 한번의 변화는 티모시 달튼의 <살인면허>였다. 본드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살인면허를 버리고는 다이하드 액션을 펼쳤다(또 데자뷔!). 그러나 관객은 두번의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카지노 로얄>은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본드팬들은 피어스 브로스넌의 얄궂은 본드-판타지에 지쳐 있었고 마침 ‘본 시리즈’는 액션 스파이물을 새롭게 정의하며 관객층을 넓혀놓았다. <카지노 로얄>의 제작진들은 ‘본 시리즈’의 트렌디한 액션을 도입하고, 전통적인 본드 이미지나 오프닝 크레딧 같은 요소들을 싹 제거함으로써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되살려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다. <퀀텀 오브 솔러스>의 임무는 막중하다.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트위스트를 뛰어넘어 단단한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퀀텀 오브 솔러스>가 선택한 길은 전통적인 제임스 본드 영화로의 복귀다.

<퀀텀 오브 솔러스>의 이야기는 <카지노 로얄>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베스퍼의 죽음을 야기한 조직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본드와 M(주디 덴치)은 이들이 MI6 내부에 이중첩자를 둘 만큼 대담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본드는 내부첩자가 돈세탁을 위해 아이티에 은행계좌를 만들었다는 정보를 따라 아이티로 향하고, 그곳에서 조직의 수뇌부인 도미닉 그린(마티외 아말릭)과 그의 연인 카밀(올가 쿠리렌코)을 만나게 된다. 도미닉 그린은 강대국들이 군침을 흘리는 천연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볼리비아의 군부 세력인 매드라노 장군(호아킨 코시오)과 손을 잡으려 하고, 카밀은 그린을 통해 집안의 원수인 매드라노 장군을 살해하려고 한다. 개인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힌 본드와 카밀은 손을 잡고 MI6의 명령도 거부한 채 조직의 내부로 접근해 들어간다.

옳다. 액션에 관해서라면 <퀀텀 오브 솔러스>가 제이슨 본 시리즈를 흉내낸다는 지적도 온당하다. 본 시리즈의 액션을 총지휘했던 댄 브래들리가 제2유닛 감독으로 참여한 덕분에 <퀀텀 오브 솔러스>의 이탈리아 시에나 액션장면은 <본 슈프리머시>의 탕헤르 액션장면의 배다른 쌍둥이처럼 닮았다(액션의 설계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쾌감도 완벽할 정도로 흡사하다). 그러나 새로운 본드 영화가 제이슨 본 시리즈가 되기를 원한다고 입버릇처럼 평하는 건 다소 식상하고 상당히 게으르게 느껴진다. 오히려 <퀀텀 오브 솔러스>는 숀 코너리 시대의 본드 영화에 대한 오마주에 가깝다. 프로덕션디자인부터 비행기, 보트, 자동차 추격신을 종횡무진하는 액션장면의 컨셉까지, <퀀텀 오브 솔러스>는 클래식 본드 영화의 요소들을 모조리 끌어들여 화면에 펼친다. 올드팬이라면 MI6 에이전트 필즈(젬마 아텐튼)가 온몸에 석유가 칠해진 채 침대 위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골드핑거>를 떠올리며 씨익 웃었을 게다.

이건 후퇴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본드 영화의 도식적인 공식은 그 자체로 완벽해서 조금도 손댈 필요가 없다. 제작진의 궁극적인 목적은 숀 코너리 시절에 완성된 본드 영화의 공식과 <카지노 로얄>이 창조한 새로운 본드의 황홀한 교접이었다. 남미의 자원을 착취하며 군부 세력을 돕는 영미권 국가들과 다국적 기업을 슬며시 비판하며 리버럴한 관객을 다독이는 <퀀텀 오브 솔러스>의 정치적 양념을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게다. 본드는 제임스 본드다. 살인면허를 가진 이 영국 남자는 전보다 빨라지고 훨씬 더 거칠어졌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전과 같은 남자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도 마찬가지다. <퀀텀 오브 솔러스>는 당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 최강의 화력을 뿜어내지만 결국 변치 않는 클래식 본드 영화다.

<퀀텀 오브 솔러스>는 완벽한 결말을 맺지 않는다. ‘퀀텀 오브 솔러스’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맥거핀이며, 모리스 그린을 능가하는 실세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퀀텀은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에 이어 트릴로지를 완성할 차기작에서야 제모습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 퀀텀의 실세가 블로펠트의 아들이어도 놀라지 말지어다.

Tip/ <퀀텀 오브 솔러스>의 러닝타임은 단출한 106분이다. 시리즈 중 가장 러닝타임이 길었던 145분의 <카지노 로얄>은 물론이거니와 EON 프로덕션이 제작한 역대 본드 영화 중에서도 가장 짧다.

프러덕션디자인의 클래식 향취

<퀀텀 오브 솔러스>의 복고적인 향취를 더욱 돋우는 것은 전반적인 프로덕션디자인이다. 프로덕션디자이너 데니스 개스너가 창조한 영화 속 공간들은 <살인번호>(1962)에서부터 <문레이커>(1979)까지,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 시절 본드 영화의 미술을 총괄했던 프로덕션디자이너 켄 애덤의 작품들을 똑 닮았다.

데니스 개스너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최후의 격전이 벌어지는 볼리비아 아타카마 사막의 호텔이다. 그는 초창기 본드 영화에 곧잘 등장하던 60년대 모더니즘적인 건물을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건설해버렸다. <카지노 로얄>의 현실적인 배경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오로지 클라이맥스의 결투만을 위해 창조된 비현실적인 건물을 지켜보며 기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사막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듯한 호텔이 존재하는 게 과연 현실적인가?라는 질문은 별 소용이 없다. <퀀텀 오브 솔러스>의 마지막 무대는 켄 애덤이 <골드핑거>(1964)나 <두번 산다>(1967)에서 건설한 악당들의 요새에 바치는 오마주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퀀텀 오브 솔러스>를 “켄 애덤의 손길이 깃든, 클래식 본드 영화”라고 표현한 이유가 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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