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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배우스케치] 프레디 로드리게즈

<식스 핏 언더>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프레디 로드리게즈가 연기한 장의사 리코였습니다. 여기엔 그렇게 복잡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들 중 제가 편안하게 감정이입을 할 만한 인물은 리코밖에 없었어요. 전 복잡한 심리적 문제를 안은 현대인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식스 핏 언더>처럼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모아놓은 프로그램은 보는 동안 정신이 혼미해지게 마련이지요. 그렇게 되면 자신을 지탱할 가장 안전한 캐릭터를 찾게 마련인데, 그게 바로 리코였던 겁니다. 물론 그에게 저를 몽땅 의탁할 수는 없지요. 그는 동성애 혐오증을 가진 히스패닉 마초니까요. 하지만 그 점을 빼면 그는 준수했습니다. 그는 자기 직업세계에서 천재였으며, 가족과 직업과 책임에 충실했지요.

워낙 리코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보니 전 프레디 로드리게즈의 다른 영화를 볼 때도 늘 리코에 맞추어 생각했습니다. <포세이돈>을 볼 때는 “와, 리코가 나왔네? (조금 지나면) 잉, 리코가 죽었잖아”라고 반응하는 식이죠. 이런 식으로 본 영화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가 주연인 영화는 많지 않으니 캐스트 정보에서 누락되는 경우도 많죠. 그 때문에 늘 별다른 정보없이 영화를 보다가, “와, 리코가 나오는구나”라고 놀라는 거예요.

리코 때문인지 몰라도 전 프레디 로드리게즈를 히스패닉 남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넣고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물론 비교적 긍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죠. 그는 갱 멤버보다는 일찍 결혼한 뒤 열심히 가족을 부양하는 성실한 청년의 이미지에 더 맞습니다. 자연인 로드리게즈도 그런 사람이기도 하고요. 다소 지루하긴 하지만 그가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히스패닉 남성 이미지의 변주입니다.

그의 이미지가 긍정적인 건 외모 때문입니다. 이 역시 비교적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잘생겼기보다는 예쁘게 생겼고 나이보다 어려 보이며 체격도 작습니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해 보여요. 자연스럽게 호감이 가는 조연을 맡을 가능성이 커지는 겁니다. 이런 배우들은 인종문제를 다룬 작품에서 희생자 역할을 하며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가 굳어지면 맡을 수 있는 캐릭터가 제한되게 마련이지요. 그 때문에 전 <레이디 인 더 워터>에서 그가 한쪽 팔의 근육만 발달시킨 보디빌더로 나오는 장면이 슬펐습니다. 그는 육체적 힘을 쓰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육체의 반쪽만 허용받았던 것이죠. 안전한 이미지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그의 유일한 주연작 <플래닛 테러>를 보았을 때 제가 재미있었던 것도, 그런 이미지가 거의 완벽하게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거의 ‘안티 프레디 로드리게즈’를 연기했어요. 그의 캐릭터 엘 레이는 터프하고 폭력적이고 폼을 엄청 잡으며 영화 내내 하드보일드 탐정처럼 거친 폭언을 씹어댑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고고 댄서 여자친구에겐 뜨거운 연인이기도 하고요. 그는 늘 얼굴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데, 총질하고 칼질하고 점프하는 것보다 얼굴에 힘주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땠냐고요? 그게 참 재미있었습니다. 연기 면에서 그는 나무랄 데가 없는 70년대식 액션 영웅이었습니다. 가끔 얼굴에 지나치게 힘을 준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라인드하우스>에서 그 정도 과장은 당연한 거죠. 하지만 아무리 그가 성공적으로 히스패닉 터프가이를 연기해도 전 그가 프레디 로드리게즈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린이 바이크를 멋지게 타면서 사람들을 이끌던 그의 귀여운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것이죠. 아마 그렇기 때문에 엘 레이의 캐릭터가 더 재미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짜 덩치 큰 터프가이처럼 생긴 터프가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뭐가 재미있습니까? 의외성과 대비가 주는 매력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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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