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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피와 살이 썩는 밤

“빌 게이츠가 술집에 들어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평균소득이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하지만 그게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경제학에서 가끔 사용되는 비유다. 통계와 평균은 전체를 수량화하여 다루는 유용한 방법이지만 그에 따르는 착시현상과 한계는 잘 알려져 있다. 양적 평가는 질적 분석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그 방법론이 불가피한 수단을 넘어 대다수의 고단한 현실을 숨기는 이데올로기가 된 경우다. 10%는 천국에, 90%는 지옥에 있을 때, 평균하면 연옥에 있다는 것이 지옥에 있는 내게 위로가 되는가. 생계가 막막하여 두 아이를 안고 지하철 선로 앞에 선 내게 그 숫자가 따뜻한 손을 건네주는가?

‘전체 파이를 키우기 위해 될 놈을 밀어주자’는 말은 그럴듯하다. 지나친 평등이 사회의 활력을 해칠 수 있다는 것도 수긍된다. 그러나 그 주장을 하려면 ‘도대체 언제까지’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런 각론없이 유사 이래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주장한다면 ‘가진 자가 더 가지려는 것’이란 혐의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국제적 통계자료들은 우리나라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누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다못해 ‘전체 파이의 성장’을 위해서도 말이다. 작은 기업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몫을 주는 것이 선물을 주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있어 승자가 되었는데 왜 내 몫이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은 이 사회 덕분이 아니면 사냥하고 열매 따는 생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사회와 협업하지 않으면 평생을 바쳐도 당신이 3년마다 바꾸는 자동차의 뒷바퀴 하나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당신이 승자인 것은 현재 ‘게임의 규칙’의 결과일 뿐이며, 이것이 당신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면 바꿀 수 있고, 바꾸어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당신은 3루에서 태어나고서 자신이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이런 마당에 금융위기가 몰려왔다. 목욕탕에서 냉탕, 온탕을 오가는 게 혈액순환에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위기다’, ‘아니다’를 반복하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번에 배웠다. 이런 정부가 위기의 본질이 ‘자본주의 종말의 징후’인지 ‘신자유주의의 종말’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금융정책의 실패’인지를 알 것이라고는 이제 기대하지도 않는다. 원통한 것은 폭풍우가 실물경제로 번져 경기후퇴와 실업으로 이어질 때 한계상황에 몰리는 것은 작은 기업과 가난한 사람들일 거라는 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경제를 살린다는 예쁜 구호 아래 여전히 ‘많이 가진 자와 아주 많이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 명백하고, 금융위기의 발생 원인에 비추어볼 때 효과와 위험이 재검토되어야 할 자유무역협정(FTA)을 서두른다. 부자들의 주머니가 좀 가벼워진 것이 그렇게 안쓰러운가? 미국 공화당의 부자들을 위한 감세정책이 분배는커녕 성장에도 도움이 안됐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는가?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소식은 왜 당국자들에게만 배달사고가 났는가?

미국 민주주의가 곱게만 보이진 않지만 이 국면에서 오바마를 선택한 건 부럽다. 운도 없는 우리에겐 선거가 너무 멀고, 당국자들은 새로운 상황을 연구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자신들이 밸도 없이 떠받드는 미국에 닥친 상황과 대처하는 모습으로부터 당국자들이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이 정말로 신봉하는 것은 뭘까? 누구는 지하철에, 누구는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정말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 그런데 숫자놀음 대신 피와 살과 영혼이 있는 구체적인 인간을 생각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려 할 때 난 왜 이렇게 무력한 느낌이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