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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지만 씁쓸한 여운 <해피 고 럭키>
김도훈 2008-11-19

(사람에 따라서)주인공 사랑스러움 지수 ★★★★ (사람에 따라서)주인공 짜증스러움 지수 ★★★★ (모든 사람들이)서너번 포복절도할 지수 ★★★★

‘해피-고-럭키’(happy-go-lucky)는 낙천적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건 마이크 리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사전 그대로 받아들이기 참 어렵다. 생각해보라. 리는 켄 로치와 함께 영국 노동계급/좌파 영화인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물론 그의 영화는 가끔 지나치게 딱딱해서 몸 좀 풀었으면 싶은 켄 로치보다는 삶에 대해 조금 더 긍정적이고 비뚤어진 영국식 유머도 종종 일품이긴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이크 리가 현미경을 들이대는 대상이 희망없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팍팍한 인생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낙천적’이라는 제목은 기실 정반대의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측은 맞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하다.

영화의 ‘해피-고-럭키’한 주인공은 포피(샐리 호킨스)다.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 의상 스타일은 80년대풍 스트리트 패션과 60년대 플라워 히피의 만남. 얼굴은 호감가지만 얼굴로 호강할 만큼 예쁘다고 할 수는 없고, 나이 서른에 주위에는 독신녀 친구들만 드글드글 끓는다. 주말이면 밤새도록 술을 진탕 퍼마시며 클러빙에 열중한다. 포피는 행복하다. 그녀는 자전거를 도둑맞아도 화내지 않는다. 대신 “(자전거랑) 마지막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네”라고 아쉬워한 뒤 자동차 운전교습을 받기 시작한다. 이 여자. 이상한 여자다. 문제는 그녀의 대책없는 낙관성이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나 호의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라는 거다.

<해피 고 럭키>에는 일정한 줄거리가 없다. 포피는 플라멩코 댄스를 배우러 다니고,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학교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친다. 마이크 리는 이 <BBC> 시트콤의 재편집 특별판 같은 영화에서 포피의 내면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관객은 이 여자가 대체 무엇 때문에 정신병적일 정도로 매사에 행복한지 모두지 알 수가 없다(과거의 트라우마? 환경적 요인? 그런 거 보여질 리 없다). 대신 마이크 리는 포피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포피라는 인물을 재구성한다.

영화가 절정이라고 할 만한 부분에 이르는 건 포피의 운전교습 에피소드다. 개인 운전교사인 스콧(에디 마산)은 전형적인 영국 노동계급 남자로, 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엄격한 법칙에 의해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스콧은 이 실없는 여자가 대책없이 흩뿌리는 천진난만함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의 세계관은 자그마한 자가용 속에서 폭발한다. 이 장면에서 절반의 관객은 스콧에 감정을 이입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의 관객은 포피를 사랑하면서도 스콧의 분노를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인간의 끝없는 낙천주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건 그저 포피가 세상에 맞서는 개인적인 힘일 따름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이 영화는 냉랭하고 고된 세상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삶의 찬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이크 리도 그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삶에 보내는 축사”라고. 사실 마이크 리는 언제나 그랬다. 은밀한 가족의 비밀이 까발려지는 <비밀과 거짓말>도, 불법 낙태를 불법인 줄 모르고 해내던 노동계급 여자의 삶이 찢겨지는 <베라 브레이크>도, 마이크 리는 관객을 향해 살짝 한쪽 눈을 찡그리며 삶의 예찬인 척했다.

그러나 그 모든 영화들이 무조건적인 낙천주의의 선물은 아니었듯이 <해피 고 럭키>도 그렇지는 않다. 마이크 리는 리젠트 파크의 호수에서 친구와 배를 타는 포피의 모습을 비추더니 갑작스럽게 영화를 닫아버린다. 이것으로 끝, 그리고 다음 회에 계속. 삶은 시트콤처럼 계속된다. 포피는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갈 것이고, 스콧도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갈 것이다. 두 세계는 서로를 감화시키거나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마이크 리는 로맨틱코미디를 만든 건 아니다. 그는 ‘워킹 타이틀’의 여주인공 하나를 진짜 세계로 던져넣었다. 달콤하지만, 쓰다.

tip/ 샐리 호킨스는 2008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런던의 낮과 밤

영국을 사랑하는 앙글로필리아(Anglofilia: 영국 애호가들)에게 <해피 고 럭키>는 꽤 근사한 영상 가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 포피의 집은 전세계 빈티지 스트리트 패션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메카로 떠받드는 런던의 캠든 타운에 위치하고 있다.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는 캠든 타운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은 런던을 무대로 하는 다른 영화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또 하이드 파크와는 또 다른 정취를 가진 리젠트 파크의 평화로운 풍광이 등장하고, 젊은 클러버들이 모이는 런던의 밤생활도 눈으로 즐길 만하다. 마이크 리 감독과 딕 포프 촬영감독에게 <해피 고 럭키>의 또 다른 주인공이 런던이었음은 분명하다. 마이크 리 감독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주인공을 담아내기 위해 최초로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선택했고, 도통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런던의 햇살 가득한 정경을 담기 위해 원색을 최대한 살리는 후지의 비비드(Vivid) 필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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