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갱스터 장르의 외투를 빌려 입은 ‘영화에 관한 영화’ <매직 아워>
김혜리 2008-11-26

상황 개그 지수 ★★★★ 배우 화음 지수 ★★★☆ ‘인생은 아름다워’ 지수 ★★★

*주/ 이 리뷰는 <매직 아워>의 일본 개봉판(136분)을 보고 작성했습니다. 한국 극장 개봉은 해외배급용 편집본(111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어 동사‘슛’(shoot)에는 총을 쏜다는 뜻도, 영화를 찍는다는 뜻도 있다. 한숏의 촬영을 끝낼 때 감독은 칼로 벤다는 의미의 단어‘컷’(cut)을 외친다. 이 단순한 중의법을 <매직 아워>만큼 종횡무진 천방지축 활용한 영화도 흔치 않을 것이다. 미타니 고키 감독의 <매직 아워>는 갱스터 장르의 외투를 빌려 입은 ‘영화에 관한 영화’이며, 중심인물은 영화감독으로 위장한 갱과 킬러로 열연하는 배우다.

<매직 아워>의 무대는 가상의 일본 항구도시 수카고. 휴대전화를 쓰고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엄연한 현대지만, 거리 풍경은 금주법 시대 미국의 복제판이다. 폭력조직원인 호텔 지배인 빙고(쓰마부키 사토시)와 보스의 여자 마리(후카쓰 에리)는 밀회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다. 보스(니시다 도시유키)가 얼굴 없는 킬러 데라 토가시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빙고는, 데라와 친분이 있다고 허풍을 떨어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신출귀몰한 데라를 찾을 도리가 없는 빙고는 무명 배우에게 전설의 킬러를 연기하도록 만든다는 꾀를 낸다. 감독을 사칭한 빙고에게 넘어온 것은 마음은 험프리 보가트지만 현실은 만년 엑스트라인 무명 배우 무라타(사토 고이치). 일생일대의 배역을 만나 예술혼에 불타는 이 남자는 몰래카메라에 정해진 대사도 없는 수상한 현장을 ‘리얼리즘’이라는 한마디에 납득해버린다. 그런데 웬걸, 무라타가 펼치는 필생의 열연은 보스와 조직의 신뢰를 얻고 적수의 두려움을 자아내더니 급기야 빙고까지 감화시킨다.

<매직 아워>의 코미디는 무라타의 연기 문법과 갱들의 풍습이 마주치는 순간 불꽃을 튀긴다. 갱 보스는 고무총을 휘두르며 적진에 뛰어든 무라타가 거물 킬러답게 담대하다고 감탄하고, 말단 조직원을 신인배우로 착각한 무라타는 ‘진짜 갱처럼 보이는 법’을 가르친다. 배우의 장르적 연기와 갱들의 허세가 어찌어찌 어울릴 때, 불분명한 의사소통이 엉뚱한 위협적 상상을 자아낼 때, 관객은 톱니가 딱딱 맞는 동상이몽 유머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가짜가 우연히 진짜를 압도하는 상황은 낡은 공식이지만 미타니 고키 감독은 대사의 합을 맞추는 데 그치지 않고 주변 인물 배치와 긴 호흡의 복선까지 통제해 입체감과 역동성을 더했다. 영화 촬영현장을 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매직 아워>의 각본에 예리한 관찰이 깔려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똑같은 말과 동작을 수십번 반복하는가 하면 순식간에 감정이 뒤바뀌는 촬영현장 풍경은, 한발만 물러서서 보면 희극이 된다는 점을 미타니 고키는 간파하고 있다.

상황 코미디가 일으키는 야단법석 도미노 게임 속에서도 <매직 아워>가 집중력을 잃지 않는 까닭은, 필름에 평생 단 한번이라도 진정한 연기를 남기려는 무명 배우 무라타가 영화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라타는, 공헌한 만큼 주목받은 적 없는 무수한 스탭들, 단 한번 빛났다 사라져간 배우들, 예술가의 혼을 가졌으나 거기 걸맞은 재능이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자기가 창조한 캐릭터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감독 미타니 고키는 갱 보스부터 배우 매니저까지 극중 인물 전원이 선물을 하나씩 안고 퇴장하게 만든다. 현실은 그렇게 조화롭고 아름다울 리 없다. <매직 아워>는 “재벌부터 신용불량자까지 같은 도시락을 먹는” 집단 창작의 현장을 일종의 트와일라이트 존(twilight zone), 현실을 초월한 이상향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면 재벌과 신용불량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매직 아워>의 결정적 영리함은 제목에서 표명했듯 자신이 그린 낙원이 찰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tip/<매직 아워>는 지난 2월 작고한 이치가와 곤 감독에게 헌정됐다. 이치가와 곤 감독은 별세하기 전 극중 영화 촬영현장의 카메오로 출연해 후배 감독의 경의에 화답했다.

1920년대 미국 뒷골목 재현의 비밀

한국에 개봉된 미타니 고키 감독의 전작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일부 평자로부터 일본영화 최초의 스크루볼코미디로 불리기도 했다. 미타니 고키 감독은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외양을 흡수하는 데에 능란하다. 미국 코미디식의 속도감과 캐릭터, 음악의 쓰임새에 덧붙여 <매직 아워>가 야심차게 도전한 제작 요소는 갱들이 주름잡던 1920년대 미국 도시를 모사한 항구 마을 ‘수카고’의 세트. 이미 미타니 고키는 일본 내에서 60억엔을 벌어들인 전작 <더 우초우텐 호텔>에서도 거대한 호텔 세트를 지어올린 바 있다.

흡사 <아가씨와 건달들>의 무대장치를 떠올리게 하는 <매직 아워>의 세트는 1천평 규모로 도쿄에 자리한 도호스튜디오 세트 세곳을 합쳐 건설됐다고 한다. 프로덕션디자인은 <훌라걸스> <하나와 앨리스> <킬 빌 VOL.1> <이노센스>의 미술을 담당했던 다네다 요헤이가 지휘했다. <매직 아워>의 엔딩 크레딧은 수카고 세트가 수많은 스탭들의 노고로 골조를 올리고 살이 붙는 과정을 저속촬영된 필름으로 보여준다. 마침내 눈에 익은 건물과 골목이 완성되면 갱들을 태운 자동차가 호텔 앞에 도착한다. 바로 영화 첫 장면의 반복이다. “당신이 방금 본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라고 속삭이는 감독의 추신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