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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빠지는 포만감 <오스트레일리아>
김혜리 2008-12-10

안구정화 지수 ★★★☆ 정치적 올바름 지수 ★★★★ 종합선물세트 지수 ★★★☆

땅덩이는 크고 영화는 길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젠 할리우드도 웬만해선 손대지 않는 고풍스런 대작이다. 아니, 대작들의 합체라는 말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스크루볼코미디, 서부극, 멜로드라마, 전쟁서사극 등 할리우드의 고전적 장르들이 개척민의 마차 대열처럼 2시간46분 동안 행진하는 장관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차를 몰고 가는 인물과 거기 실린 이야기는 철두철미 오스트레일리아산(産)이다. 영국 귀족이 식민지의 카우보이를 만나 신세계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원주민 혼혈 소년을 거두어 가족을 이룬다는 줄거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진정한 국가 정체성을 반추하고 희망찬 미래를 도모하자는 메시지를 노래한다. 그것도 연주로 치면 오케스트라와 120인 합창단의 웅장한 편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피어오른 1939년. 영국의 당찬 귀부인 새라 애쉴리(니콜 키드먼)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사업차 떠난 남편이 돌아올 줄 모르자 외도를 의심하며 몸소 적도를 건넌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당도한 패러웨이 다운즈 목장에서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바람난 남편이 아니라, 살해된 그의 시신. 고용인 닐 플레처(데이비드 웬햄)가 권하는 대로 목장을 이웃의 대농장주 킹 카니(브라이언 브라운)에게 넘기고 귀국하려던 새라는 혼혈 소년 눌라(브랜든 월터스)의 고발로 닐의 흉계를 알게 된다. 목장을 처분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고용인들과 함께 1500마리의 소를 몰고 항구도시 다윈까지 가야 할 처지가 된 새라는 프리랜서 카우보이 ‘몰이꾼’(휴 잭맨)에게 도움을 청한다. 플레처의 방해 공작과 싸우는 험한 여정에서 새라는 예정된 것처럼 몰이꾼, 그리고 아름다운 대륙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 육우산업이 독점을 벗어나기까지’라고도 요약되는 이 지점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2막의 끝에 불과하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연출은 다다익선(多多益善) 전략을 신봉한다. 영화 도입부는 캐서린 헵번과 험프리 보가트가 티격태격하던 <아프리카의 여왕>을 재연하고, 험난한 소몰이 여정은 존 포드의 서부극을 추억하게 한다. 새라와 몰이꾼이 맺어지는 무도회는 타라 농장의 주인 스칼렛과 레트 버틀러가 춤추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일본군의 폭격 시퀀스는 <진주만>을 상기시킨다. 숱한 오마주 대상 중에서도 으뜸은 <오즈의 마법사>. 주디 갤런드의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는 소년 눌라의 입술로 옮겨와 주제가 노릇을 톡톡히 한다. 다양한 민족이 공존 번영할 미래의 오스트레일리아야말로 ‘무지개 너머’ 꿈의 땅이라는 암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압도적인 로케이션 풍광은 컴퓨터그래픽을 상대적으로 조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혼혈인을 색출하는 관리가 들이닥쳤을 때, 사건의 여파를 하나의 공중 숏으로 두루 잡아낸 대목은 툭 터진 공간의 영화적 힘을 자랑한다. 야외로 뛰쳐나간 <오스트레일리아>는 바즈 루어만의 이른바 ‘붉은 커튼 3부작’ <댄싱 히어로>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루즈>의 무대 미학과 일견 단절된 듯 비친다. 그러나 연출이 관객에게 미칠 정서적 효과를 잔뜩 의식한- 그리고 그 의식을 감추지 않는- 루어만의 키치적 취향은 그대로다. 더불어 음악으로 감정을 펌프질하는 경향도 여전해 인물이 노래하지 않는데도 뮤지컬을 보는 듯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피날레인가 싶은 순간을 몇번이나 넘겨서야 대단원에 다다른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그랬듯, 이야기에 대한 연출자의 애착이 지극한 탓이다. 올해 초 총리가 원주민과 혼혈 국민에게 정부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공식적으로 사과한 마당에 오스트레일리아 관객에게 이 영화의 의미는 각별할 터다. 초대받은 손님 입장에서 말하자면 연설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배부른 다음에도 요리가 연방 나오는 연회에 참석한 기분이다. 진이 빠지는 포만감이다.

tip/ <오스트레일리아>는 1억3천만달러로 제작됐으며 자국 관광청이 예산의 큰 몫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드먼·잭맨 등 호주 배우 총출동

바즈 루어만 감독은 캥거루와 코알라 다음으로 국가 이미지에 기여해온 스타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을 필두로 자국 배우를 대거 기용했다. 새라 역의 니콜 키드먼은 <물랑루즈>, 샤넬 No.5 향수 TV 광고에 이어 세 번째로 바즈 루어만 감독과 손잡았다. 슬랩스틱에서 전쟁서사극까지 넘나들다보니 덜거럭거리기 십상인 이 영화를 묶어세우는 힘은 니콜 키드먼의 자로 잰 듯 다채로운 연기에서 나온다. <무지개 너머>를- ‘오즈’는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조국을 일컫는 애칭이기도 하다- 어설프게 얼버무리며 부르는 모습이 백미. 상대역 휴 잭맨은 이름도 없이 그저 몰이꾼(Drover)으로 명명된 캐릭터답게, 매우 전형적인 카우보이를 표현했다. 모닥불 앞에서 잘게 다진 근육을 짐짓 전시하는 장면이 있다.

집요한 악인 플레처를 연기한 데이비드 웬햄은 <반지의 제왕>의 파라미르, <300>의 딜리오스 역으로 알려진 얼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TV시리즈 <시 체인지>(Sea Change)의 다이버 역으로 90년대 말 일찌감치 스타덤에 뛰어올랐다. 바즈 루어만과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나리오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대농장주 킹 카니 역의 브라이언 브라운은 1980년대 TV시리즈 <가시나무새>와 영화 <브레이커 모랑> <FX> 등으로 명성을 떨친 베테랑이다. 소년 눌라의 곁을 맴도는 주술사 킹 조지 역은 아보리진 배우 데이비드 굴피릴이 맡았다. 부족공동체에서 전사로 교육받으며 자란 굴피릴은 1969년 니콜라스 뢰그 감독의 <워크어바웃>의 주연으로 캐스팅됐으며 이후 피터 위어, 필립 노이스 등과 작업했다.‘워크어바웃’은 숲을 떠들며 치르는 의식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극중에서 킹 조지가 눌라에게 재촉하는 성인식이기도 하다. 전통 아보리진 춤과 악기의 명인인 굴피릴은 세계 여러 도시에서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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