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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워낭소리여, 나의 신음소리여
김연수(작가) 2009-02-12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쓴 농약이름 모자를 보며 가자와 용산을 떠올리다

결국 결론은 “신토불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일까? 샌드위치, 햄버거, 스테이크, 파스타…, 현지에서 먹는 양식이란 정말 기가 막힌 맛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두달하고도 몇주째 입에 넣다보면 그게 도무지 음식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음식이라고 먹다니. 그런 독백이 절로 나온다. 그 지경이 되면 남의 나라에 있는 건 자신이면서 그 나라 전체가 글러먹었다는 듯이 투덜거리게 마련인데, 지난호에 실린 글을 보니 중혁군이 지금 딱 그 지경인 것 같다. 무슨 스포일러의 폭력이니, 고분고분 당하고 있지 않겠다느니. 역시 빨리 귀국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지만….

순진무구한 초딩의 표정으로 울어버렸네

<워낭소리>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뭐, 그 정도, 그러니까 신토불이 의식을 고취시키는 다큐멘터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럼에도 극장까지 가서 다큐멘터리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안면이 있는 박봉남 독립 PD의 소개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화면발이 받는 얼굴인지 그간 여러 다큐멘터리에 출연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분이다. 이분이 그 글에다 “아! 나는 75분 내내 숨을 죽이고 이 영화를 봤다. 아!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다”라는 소감을 남긴 것이다. 이러니 어찌 극장에 가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내 다큐멘터리 인생 최고의 후회는 <푸지에>를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이니.

그래서 파주까지 가서 다큐멘터리를 봤다. 무조건 이 다큐멘터리를 보시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표현에 인색한 박봉남 PD가 “아! 아!”라고 신음소리를 적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박봉남 PD는 어떤 경우에 “아! 아!”라는 신음소리를 내는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특히 경제적 보상을 바라지 않고 뭔가를, 그것도 몇년에 걸쳐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이런 신음소리를 낸다. 다큐멘터리를 볼 때 문제가 있다면 내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다는 점이다. 그건 내가 그런 다큐멘터리의 내러티브를 표면 그대로,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무시하는 예술가들의 진심을 의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돈을 무시하는 한 그들은 진실을 말하게 돼 있으니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볼 때,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초딩의 표정으로 곧이곧대로 내러티브를 따라가다가 끝에 가서는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자바라·키타진·골자비…

솔직히 말하겠다. 그간 나는 영화산업을 혐오하던 사람이었다. 지난 몇년간 영화에 대해 한국영화계가 말하는 것은 오직 돈에 대한 말들뿐인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극장에 갔다가 내 몸에서 나올 만한 체액이라곤 위장에서 솟구치기 시작해 구강을 거쳐 턱으로 흘러내리는 걸쭉한 액체뿐이라는 걸 여러 번 확인했다. 내가 아는 좋은 감독들은 몇년째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그 걸쭉한 액체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돈에 대해서만 말할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순수한 불만족일 뿐이다. 순수한 불만족, 그러니까 업자들의 불만족.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에 나오는 노인처럼 이 세상에 ‘대운하 파던 업자’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들은 항상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으니까.

나는 경제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무시하는 건 경제만을 얘기하는 자들이다. 그 사람들은 왜 경제만을 얘기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경제란 자신들만 챙기는 돈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다 같이 돈을 버는 문제라면, 그렇게 쉬지도 않고 경제만을 얘기할 리는 없다. 난 그 정도로 인간이 이타적이라고는 믿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돈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 독립제작에 나서자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워낭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가 먹을 풀을 길러야 하니까 할아버지가 농약을 치지 않자 할머니에게 지청구를 듣는다. 그럴 때조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에는 ‘자바라, 키타진, 골자비’ 같은 글자가 적힌 모자를 쓰고 있다. 그 모자를 그들에게 씌운 건 농약회사들이다.

무조건 극장에서 돈을 내고 보시라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다. 우리가 아무리 매매의 세계를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세계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할아버지는 ‘안 팔아, 안 팔아’라고 소리 질렀고, 40살이 먹은 소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겨울 동안 할아버지 내외가 불을 땔 수 있도록 나무를 해놓은 뒤에야 죽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안 판다고 해도 우리는 끝내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무를 잔뜩 해놓고서야 죽는 소를 우리는 이제 더이상 볼 수 없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사라지는 농촌의 정경을 다룬 작품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바라, 키타진, 골자비’는 무엇을 구매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세상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보시라. 무조건 보시라. 극장에 가서 돈을 내고 보시라.

그렇긴 해도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에 마을 이름이 적힌 모자를 씌워드리고 싶었다. 그 옛날 <전원일기>에서 유인촌이 쓰던, ‘양촌리’라는 글자가 인쇄된 모자 같은 걸. 종자처리중화제나 도열병방제제의 이름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름이 적힌 모자를. 변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대통령 한명 바뀌었을 뿐인데, 지금 우리는 아주 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또 다른 독립 PD 한명이 시리아에 가자고 했다. 거긴 위험하지 않아요? 내가 대답했다. 입국하기 어려울 뿐이지, 위험하지는 않단다. 만약 그게 가자 지구였다면? 절대로 안 갈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불에 타서 죽은 날이다. 포털에 들어가니 메인에 ‘돌아온 그들 앞엔 부서진 집과 가족 시신뿐’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허겁지겁 클릭했더니 일방적으로 휴전이 선언된 가자 지구에 대한, 연민에 가득 찬 보수신문의 기사였다. 평소 국내문제를 다루던 논조를 보면 이스라엘을 극렬 지지해야만 할 텐데 자기 이익과 관계없는 딴 나라의 일에는 이처럼 상식적이다. 나도 모르게 용산을 다룬 기사인 줄 알고 클릭할 정도로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제정신이 박혔으면 누가 가자 지구에 입국하겠는가? 중혁군도 그냥 유럽에 있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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