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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 see] <다우트> 의심으로 비틀거리는 당신에게 바친다
김용언 2009-02-19

가톨릭에 관한 영화이면서 가톨릭에 관한 영화가 아닌 <다우트>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심심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신부가 ‘그걸’ 했다는 거야 뭐야? 수녀가 오해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다우트>는 그런 영화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믿는 자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가 대립하고, 심증만이 있는 확신은 그 자체로 ‘물증’으로 둔갑하며, 명백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게 싹튼 의심이라는 의식의 작용을 두고 거기 연루된 몇몇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어떤 화학작용이 흘러나오는지 지켜보는 그런 영화다. 그러나 적어도 메릴 스트립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얼음장 같은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면, 관객은 대부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다우트>는 정서적인 충격 면에서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묘사가 직유법으로 딱 들어맞는 영화다.

연극적 상황을 어떻게 옮겼을까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다음 해인 1964년, 브롱크스 지역의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지배하는 건 공포와 징벌의 힘을 굳게 믿는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다. 당시 정치적 변화의 바람을 타고 이곳 역시 첫 번째 흑인 학생 도널드의 입학을 허가했지만, 대부분의 교칙은 엄격한 알로이시스의 전통적 방식을 따르고 있다. 활기 넘치고 급진적인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교회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라며 공포와 존경을 강제하는 교회가 아니라 직접 신도들을 찾아가며 몸을 굽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진무구한 제임스 수녀(에이미 애덤스)는 플린 신부가 도널드에게 지나친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이를 전해 들은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의 죄를 폭로하여 학교에서 쫓아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증거는 없다. 그녀 자신의 도덕적인 확신 외에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연일 매진을 기록했으며, 한국에서도 김혜자를 주연으로 무대에 올린 바 있던 연극 <다우트>가 영화화됐다. <다우트>는 일반적으로 연극이 영화화된 작품이 가지는 장단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아니, 단점이 아니라 진입장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정확하게 한정된 시공간(1964년 브롱크스 지역의 가톨릭 학교)과 소수의 인물들(신부 한명, 수녀 두명, 흑인 소년과 그의 엄마)로만 이뤄진다. 당연하게도 1시간45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대사들과 완벽하게 메소드 연기를 구사하는 주연배우들의 섬세한 클로즈업으로 넘쳐난다. 그러니까 이것이 간소하고 금욕적인 무대 위에서라면 매우 적절한 세팅이지만, 영화로 옮겨졌을 땐 어떨까? 무엇보다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충돌을 어떻게 해소하는지를 주의깊게 지켜보는 것이 <다우트>를 보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작고 은밀한 은유들의 전쟁

60년대 중반 가톨릭 학교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의 추이를 섬세하게 훑는 이 영화는, 그렇기 때문에 다소 단조로우면서 작고 은밀한 은유들로 이뤄진다. 덩달아 보는 내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다우트>는 무엇보다 철저한 대립 구도로 이뤄졌다. 의심과 확신, 진실과 거짓말, 전통과 개혁, 남성과 여성, 볼펜과 만년필, 블랙 커피와 달디단 커피 사이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논쟁은 이미 이성과 논리의 전쟁에서 벗어나 취향과 감정의 대립으로 번져간다. 파스칼이 <팡세>의 서문에서 “우리의 모든 이성적 사고는 결국 감정에 굴복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혹은 “우리는 정신이면서 또 그만큼 자동 기계다. 그러므로 설득에 사용되는 수단은 증명만이 아니다. 증명된 사물이란 얼마나 적은가! 증명은 오직 이성만을 설득한다. 습관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신뢰받는 증명을 이룬다”라고 쓴 것과 같다.

결국 플린 신부가 부적절한 짓을 저질렀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 문제는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혹은 이미 (신부가 그 대리자인) 신에게로의 고해성사를 마쳤기 때문에 플린 신부는 그에 대해 해명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확신이 없을 때, 의심은 확신만큼 강력하고 끈질긴 놈이 된다”라며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다”라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자신이 죄를 지었건 아니건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그는 교회가 두려움을 이용하여 살찌는 장소가 아니라, 풍부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발로되고 변화하는 세상을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장소가 되길 원했다. 또한 그 자신도 그렇게 그 속에 섞여들길 원했다.

반면 알로이시스 수녀는 공적 영역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고수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짓을 저질렀는가 아닌가? 그녀는 사적인 권리 주장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즉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지만 늘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교장실에서 방문객을 맞을 때에도 언제나 “남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문을 조금 열어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관심이 있다. 거침없이 상대방의 영혼을 뚫고 들어가 죄를 읽어내려 애쓰며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한다. 그녀는 자신의 심증을 확신으로 몰아붙이는 대심문관이자, 능수능란한 프로파일러이며, 동시에 인간의 저 깊은 심연을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존재이기도 하다. 학교라는 좁디좁은 틀을 아주 살짝 벗어나는 순간, 그러니까 도널드의 엄마인 밀러 부인을 만나는 순간 그녀는 충격받는다. 알로이시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무너지는 건 자신의 (편협함이라기보다는) 무지와 무구함을 깨달은 데서 오는 충격일 가능성이 크다.

남는 것은 더이상 누군가가 실제로 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확신이라는 결과가 실상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그 불확실한 것 앞에서 주저하고 회의하고 의심하는, 스스로의 함정에 걸려 비틀거리며 그 고통스러운 심연을 깨닫는 경험이다. 그것이 알로이시스 수녀를, 제임스 수녀를, 그리고 우리를 흐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다우트>는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한 의심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강고하고 끈질기게 그 세력을 불려가며 그 안에 잠복해 있던 여타의 다른 감정들까지 헤집어내는 강렬한 유인책이 되는지에 대한 문학적 탐구에 가깝다. 추상적이고 은유적이라는 어쩔 수 없는 진입장벽은, 역설적으로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수많은 현재진행형의 개인사를 끄집어내는 레퍼런스로 작용할 수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듯 말이다.

위대한 배우들의 절정에 오른 연기

<다우트>의 어쩔 수 없는 추상성은, 대신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에이미 애덤스,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절정에 오른 연기를 통해 즉각적으로 전달된다(네명의 배우 모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배우 부문에 이름을 올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들의 핏기없고 꾸밈없는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어떻게 미세하게 움직이고, 혈색이 어떻게 바뀌고, 음조를 어떻게 바꾸며, 어떤 단어를 어떤 식으로 발음하면서 그 뜻을 미묘하게 바꾸는지를 지켜보는 건 황홀한 체험이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구속하는 하나의 육체적인 존재로 다가왔듯, 이 배우들은 ‘의심(다우트)’의 구현체다.

메릴 스트립은 “우리 모두, 인간들은 모두 복잡한 존재죠. 인간과 그들 사이의 대립의 풍경은 그 얼마나 흥미롭고 풍부한지를 일깨워주는 영화예요”라며 <다우트>를 반 다이크의 그림들과 비교했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내가 관심있는 것은 후회와 애도의 감정입니다. <카포티>와 <다우트>는 그런 면에서 비슷하죠”라며 플린 신부와 자신과의 유사성을 에둘러 표현했다. 두 사람의 느긋한 자신감과 대조를 이루는 에이미 애덤스와 바이올라 데이비스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성취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에이미 애덤스는 “그토록 존경하는 두 배우, 메릴이나 필립을 무서워하진 않았어요. 나 자신을 두려워할 따름이죠. 그들에게 100% 어울리는 연기를 해내지 못할까봐, 나 자신을 두려워했어요”라며 근사한 배우 앙상블 안에 속했던 것을 겸손하게 기뻐했다. 메릴 스트립과 단둘이 붙는 단 하나의 시퀀스에만 출연한 바이올라 데이비스는, “나는 밀러 부인처럼 호출을 받고 촬영 당일날 세트장에 나갔다. 메릴 스트립과 단둘이 연기해야 했다. 난 그 전날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창문 밖으로 던지는 심정으로 연기했다”라고 토로했다.

“당신이 ‘신’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당신이 누구를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느냐를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다우트>의 배우들이 신과 죄에 대해 논할 때 바로 그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이 영화가 ‘가톨릭’에 대한 영화가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이것은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우리 모두의, 불확실성의 시대에 눈을 가리운 채 비틀거리는 우리 모두에 대한 영화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당신도 알로이시스 수녀와 똑같은 문장을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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