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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하늘을 나는 극장의 그 10시간
김중혁(작가) 2009-02-19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3편 동시 상영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다

‘나의 친구 그의 영화’ 김연수 편 지난 줄거리 현지에서 먹는 양식이란 기막힌 맛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도무지 음식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지내고 있는 중혁군이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것은 모두 음식 때문이리라. 역시 빨리 귀국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워낭소리>를 봤다. 이 다큐멘터리를 꼭 보시라. 극장에 가서 돈 내고 보시라. (중략) 변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다시 중략) 중혁군도 그냥 유럽에 있는 게 낫겠다.

글 속의 권유가 얼마나 간절하던지 나도 그냥 유럽에 있으려고 했다. 스웨덴 묘지공원에 뼈를 묻고 싶었다(묻어주려나?). 그래서 연수군에게 계좌번호를 불러주었으나 돈이 입금되지 않아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유럽에 머물라는 건 빈말이었던 모양이다. 돈을 부쳐주지 않는다면 유럽에서 버티기 힘들다. 물가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패스트푸드점의 가장 싼 세트메뉴가 1만원에 가깝고, 물 한잔 마셔도 돈, 화장실에 갈 때도 돈, 환율은 높고, 체력은 낮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도 말은 잘 통하지 않고, 가보고 싶은 곳은 많아도 교통비의 벽은 높으니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물도 공짜로 주고(용산에 준 물대포 얘기 아니다), 말도 잘 통하고(대통령 얘기가 아니다)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모든 전자제품 100% 충전, 이륙 준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고생을 좀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여행을 싫어했다. 어떤 소설가는 <여행할 권리>라는 책도 써냈던데, 나는 <여행 안 할 권리>라도 써볼까 싶다. 여행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행기 때문이다. 난 비행기가 정말 싫다. 단거리야 뭐 그럭저럭 버틴다고 해도 장거리는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다. 잠을 이룰 수 없고, 책도 읽지 못하겠고, 중간에 내릴 수도 없다. 뭐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요즘엔 개인화면 붙은 노선도 많다던데, 내가 타는 비행기 노선엔 그런 것도 없다.

비행기 타기 전에 철저히 준비했다. 우선 공항에서 내가 가진 모든 전자제품을 100% 충전했다. 글쓰기와 영화보기, 음악듣기를 할 수 있는 노트북 컴퓨터 2시간 활용 가능. 영화보기와 음악듣기를 할 수 있는 아이팟 터치 3시간 활용 가능. 음악듣기를 할 수 있는 아이팟 6시간 활용 가능. 게임을 할 수 있는 닌텐도 7시간 활용 가능. 그러나 그 어두컴컴한 비행기 속에서 코딱지만한 닌텐도 화면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는 것은 눈에 대한 테러나 마찬가지니 어떻게든 다른 놀거리를 찾아야만 했다.

2~3년 전, 로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마지막 남은 3시간의 비행 동안 나는 창문을 붙들고 울었다. 너무 힘들어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어지러웠고,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어둠 속에서 몇몇개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하나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의 책을 밝히고 있었고, 창밖에서는 거대한 동물의 창자 같은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사후의 세계 같았다. 모든 장면이 정지화면이었다. 어서 빨리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귓속의 벌레가 윙윙거렸고, 비행기를 휘감은 엔진소리는 높은 파도처럼 작은 소리들을 삼켜버렸다. 그때 그 비행기에서의 마지막 3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런 시간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배터리가 바닥나자 기내 스크린으로

간단히 밥을 먹고- 얼마만이냐, 비빔밥!- 노트북으로 <엑스트라즈>(Extras)를 봤다. 리키 저베이스는 정말 최고다. 다음으론 <30록>(30Rock) . 티나 페이도 좋다. 그 다음으로는 노트북의 배터리가 바닥났다. 겨우 3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눈을 들었더니 눈앞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경찰복을 입은 어떤 남자가 탁자 위로 올라가더니 천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어폰을 꽂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화면만 봤다. 누군가 주인공에게 총을 쐈고, 그는 탁자에서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영화일까? 최근 영화일까? 주인공은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영화 제목 맞히기가 시작됐다. 쫓고 쫓기고, 싸우고 폭파하는, 그런 영화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그리 긴박해 보이지 않았다. ‘앗, 저 사람은?’드디어 아는 배우가 나타났다. 느끼한 아저씨 빌리 밥 손튼이다. <애스트로넛 파머>(The Astronaut Farmer)의 황당한 아저씨 역할, 재미있었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보며) 앉아 있고- 비록 제대로 보는 사람은 없지만- 스크린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비행기가 아니라 극장처럼 느껴졌다.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었거나 밤에 할 일이 없던 시절), 신촌의 극장에서 3편 동시 상영 영화를 자주 봤다. 밤 12시쯤 시작해서 아침 7시쯤에 끝나는 강행군이었다. 할리우드 액션영화 한편, 홍콩 액션영화 한편, 한국영화 한편이면 가장 알맞은 조합이었다. 아무래도 예술영화나 작가주의영화를 보며 밤을 새우기란 힘든 일이니까.

비행기는 그 시절의 극장과 비슷했다. 노곤한 기운이 감돌고, 영화는 영화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보면 보는 대로, 자면 자는 대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새로운 아침이 와도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을, 서로서로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영화는 영화대로 흘러가고, 사람은 사람대로 흘러가는, 그런 공간이었다.

동시 상영 영화가 끝나면, 나는 신촌의 버스 정류장 근처의 토스트 가게에서 토스트를 사먹었다. 맛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우적우적 간밤의 허기를 달랬다.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이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게 어디 부끄러워할 일인가, 그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할 일이지, 라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그땐 정말 부끄러웠다. 나는 출근할 데가 없었으므로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을 거꾸로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시간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면 곧바로 잤다. 시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토스트 대신 오믈렛을 먹었지

비행기 속에서 그 시절을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금방 흘러, 너무나 빨리 흘러, 지루해할 틈도 없이 쏜살같이 흘러, 나는 비행기에서 내릴 것이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동안 하지 못한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고,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일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도 할 것이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 것이다.

상영 영화는 (역시, 내 마음을 알았던지) 세편이었다. 조합도 이상적이었다. 빌리 밥 손튼이 등장했던 첫 번째 영화는 <이글아이>였다. 두 번째 영화가 <울학교 이티>, 세 번째 영화가 서부극 <아팔루사>였다. 홍콩영화가 한편 빠진 게 아쉽다. 나는 이어폰을 꽂지도 않고, 화면만 가끔 보면서 영화가 영화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나는 나대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가 끝나자 스튜어디스가 다가와서 물었다. “오믈렛과 죽이 있습니다.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나는 토스트를 주문하고 싶었지만 나의 욕구를 억누르고, 예의바른 승객답게 오믈렛을 주문했다. 속에 계란이 든 건 비슷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