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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기] “뉘우치지 않았음 좋겠다”

촬영 막바지인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신태환 역 조민기

처음에는 그저 웃었다. “태백 하늘에 나는 새들은 창고가 없어도 먹고살고, 태백산 꽃들은 물레질을 안 해도 꽃을 피우지만 이 땅, 탄광촌 사람들은 나 신태환이가 몽땅 먹이고 입혀서 산다는 사실을 모르쇼?”라는 대사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섬뜩하기도 했다. “한때의 욕망이 빚어낸 실수”라며 내연녀의 배에 칼을 들이밀어 아이를 꺼내는 모습에서는 욕도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신태환은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배우 조민기가 신태환에게 ‘숨과 심장을 장착’하자 그의 욕망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신태환이 “지금은 개발고속성장의 시대야! 고속에는 이따금 브레이크가 고장나는 수도 있으니 놀랄 거 없다고!”라고 말하거나, “쓰레기들 앞에서 내 왕국이 손상당하는 걸 보느니 죽겠다는 각오로 뛰고 있는 거다!”라고 일갈하는 모습을 보라. 심지어 그는 자신의 폭주를 끝내고 싶어도 끝낼 수 없는 아픔도 지녔다. “나는 스스로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가 없는 사람이야!” 말하자면 신태환은 변명이 없는 사업가이자, 내칠 수 없는 아버지이고, 멈추지 않는 남자다. <에덴의 동쪽>이 종영을 4회 남겨두었을 때쯤 조민기가 궁금했다. 아마도 신태환을 연기하는 조민기는 상당한 피로곰을 등에 지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드라마 속의 회장님들처럼 목덜미를 잡고 있지는 않을는지.

-거의 1년을 달렸는데, 아직도 촬영이 남았다. 신태환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나. =아직 4회분 촬영이 남았다.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신태환 같은 인물은 벌을 받아야지. 그런데 벌을 받아도 뉘우치고 받느냐, 정말 신태환답게 “너희들과 나는 역시 안 맞았어” 이러면서 받을 거냐가 관건이다. 나도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원하는 엔딩은 뭔가. =뉘우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흔히 이야기하는 교과서적인 엔딩은 싫다. 뉘우치지 않고 가는 게 리얼리티 같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이들은 모두 나름의 자기 명분과 자기 합리화로 똘똘 뭉쳐 있던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잘못을 깨닫는 건 이상할 것 같다. 소리소리 지르고 살아온 사람은 죽을 때까지 소리소리 지르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출연을 결정했을 때 신태환의 어떤 점이 매력이었나. =분명한 것이 좋았다. 신태환은 ‘불그레 죽죽 푸르딩딩’ 이런 게 없다. 빨강이면 빨강, 파랑이면 파랑이다. 그런 선명함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궁상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과거를 늘어놓으며 내가 이랬기 때문에 지금 이럴 수밖에 없다고 궁상을 떠는데, 신태환은 현재의 자신을 가지고 세상과 맞서려는 남자다. 물론 그런 모습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니까 문제지. (웃음)

-신태환으로 살면서 우울증도 겪었다고 하더라. =사실 나는 굉장히 푼수다. 웬만해서는 뭐든 즐기는데, 이놈의 신태환은 도저히 ‘fun fun’이 안되는 거다. 스튜디오 안에서 하루 종일 신태환으로 살다보면 죽음이 가까워진 걸 느낄 때가 있다. (웃음) 얼마 전에는 머리에 쥐가 나기도 했다. 머리 한쪽이 보따리 묶듯이 조여오는데, 이러다 뇌졸중으로 가는 거구나 싶더라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에게 누구 하나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우울증의 원인이었을 것 같다. =맞다. 신태환에게는 등을 두들겨주거나, 용기를 북돋워주는 사람이 없다. 도대체 기업의 총수란 사람이 허구한 날 누구 엿먹일 생각만 하잖아. (웃음) 사방이 콘크리트 벽인데, 그 안에서 내가 시멘트를 덧바르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다보니 질식할 것 같은 순간도 있더라.

-한국 현대사의 모든 종양을 지닌 인물이니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종양선물세트지. (웃음) 그런데 시청자가 신태환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결국에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만큼 된 이유는 한반도 곳곳에 신태환들이 있었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신태환을 현실의 누군가와 빗대는 경우도 많다. 아마 20대만 보는 드라마였다면 장치적인 나쁜 놈이었을 거다.

-<에덴의 동쪽>의 근본적인 갈등은 신태환이 레베카를 강제유산시키면서 벌어진다. 논란이 많았던 설정이었는데, 본인 입장에서는 어떻던가. =내 도덕관으로 신태환을 해석하면 안될 것 같다. 대신 신태환은 어떤 생각을 가진 놈이기에 ‘이따구’ 짓을 하고도 당당할 수 있을까는 고민해봐야지. 극중에서 보면 신태환은 레베카에게는 한번도 사과를 하지 않는다. 그가 정말 용서를 비는 여자는 아내인 오윤희와 제니스뿐이다. 그리고 레베카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욕정을 누르지 못한 사내의 마지막 실수”라고 쌍팔연도 대사를 하지. (웃음) 그런데 신태환에게는 그게 진실인 거다. 단지 실수였다는 거지. 동욱이가 왜 그랬냐고 물을 때도 “그 핏줄이 내 핏줄인 줄 어떻게 알아?” 이런다. “그런 여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돈만 주면 구할 수 있어”라고 해버리지 않나.

-우울증까지 겪었지만, 막상 촬영 막바지로 온 게 섭섭하지는 않나. =섭섭하기보다는 그에게서 배운 걸 느끼고 있다. <사랑과 야망>을 찍을 때도 그랬는데, 내가 연기한 인물이 내 인생의 선배처럼 느껴진다. 신태환처럼 살았을 때는 인생이 참 허허롭구나. 재계서열 몇위, 은행잔고는 얻었을지 몰라도 사각의 명함 한장이랑 인간 본연이 찾아야 하는 것을 트레이드한 거 아닌가. 멋있는 남자로 익어가는 게 뭔지 공부가 된 것 같다.

-탈색한 머리는 예전부터 악역을 맡으면 하려고 염두에 둔 설정이라고 했다. 악역에 대한 갈망이 있었나. =신인 때 정말 우유부단한 역할을 많이 했다. 그 당시 남자주인공들은 죄다 부모와 연인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는 남자였다. (웃음) 난 그런 게 답답했다. 그래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게 신태환처럼 자기 라이프가 도드라지는 악역이었다. 악행의 명분이 살아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배우 조민기의 신인 때 모습은 <도시남녀>의 유진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레옹을 벤치마킹한 안경과 모자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연기를 주로 털갈이로 시작한다. (웃음) 유진하도 분명한 남자였다. ‘사랑하거나 떠나라’란 제목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상대역인 김남주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에피소드를 정말 아프게 찍었다.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미화하는 것 없이 직언직설로 풀어나가는 면이 많았거든.

-어렸을 적 꿈은 국어 교사였다던데, 어떻게 배우를 선택했나. =국어 교사를 하고 싶었다기보다 할 수 있었다. 그때 성균관대에서 전국고교백일장을 개최했는데, 나가서 입상하면 성대 국문과에 자동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나름 어렸을 때 학교 교내 백일장을 싹쓸이해서 대표로 나갔었지. (웃음) 결국 시부문에서 상을 탔는데, 그래도 배우가 하고 싶어서 국문과에 가지 않았다. “나의 문학적 소양을 연기로 불태우겠어!”라고 했었지. (웃음) 그런데 무명 시절에는 그때 그냥 국어 선생님 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도 했다.

-최근까지 2권의 책을 냈는데, 글쓰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다. =책을 쓰는 게 자기 함정이 있더라. 첫 번째 책이 그랬다. 내가 느꼈던 건 수치적 게이지로 3인데, 이걸 표현하다 보니 막 5, 7로 나가는 거다. 아, 이거 구라다 싶더라고. 읽은 사람은 10까지도 느낄 텐데 말이지.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형용사들이 앞뒤로 줄줄이 이어지고…. 글을 쓸 때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의 찬미>로 데뷔해서 <첫사랑>에도 출연했고, 가장 최근 영화 출연작이 <해부학교실>이다. 드라마에 비하면 영화는 상당히 뜸했다. =뜸하고자 해서 뜸한 건 아니다. 한국영화시장이 어느 정도 성장가도에 들어가면서 몇몇 특정 그라운드 안에서 진행되지 않았나. 자본도 그쪽으로만 쏟아지고, 그 자본에 그 제작자와 그 배우들이 한팀처럼 돌아갔으니까. 그처럼 영화는 다소 폐쇄적인 시장이었다.

-그래도 <도시남녀>가 끝난 뒤에는 제의가 많았을 텐데. =많았지. 그런데 좀 벗는 영화들이 많았다. 이유없이 벗어야 하니까 하고 싶지 않더라. 난 이왕 벗으려면 축 처진 남녀의 멜로를 하고 싶다. 눈으로 탐닉하면서 흥분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육질이 나의 육질에 닿는 게 행복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면 좋겠지.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이 있나. =박찬욱 감독이나 김지운 감독과 해보고 싶다. 사람 심리를 잘 보는 것 같다. 서로 스타일은 다르겠지만, 두 감독 모두 배우에게서 의외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데 공을 많이 들인다. 나도 발견당하고 싶은 거지.

-다음 작품은 드라마 <선덕여왕>이다. 진평왕 역인데, 신태환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신태환 같은 미실과 갈등하는 남자지. (웃음) 옛날 왕이 다 그랬다더라. 파벌에 밀리면서 바지사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도 딸을 왕으로 세우면서 선왕의 꿈을 심어주는 아버지다. 신태환이 밖으로 외치고 소란을 피우면서 자기 신념을 표현했다면 진평왕은 자기 소신을 저변으로 깔고 가는 사람이다.

-3월 말부터 촬영이라는데, 신태환에게서 벗어날 시간이 부족한 거 아닌가. =일단 3월에 케냐에 봉사활동을 다녀올 거다. 다른 그라운드에 다녀오면 씻어내는 게 그나마 수월하다. 얼마 전에 여기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었다. <에덴의 동쪽>이 끝나가니까 이 머리를 한 모습을 남겨 놓으려고. 그런데 아무리 웃어도 신태환스럽더라. 인상쓰면 더 신태환이고. 빨리 옷을 벗어야겠구나 싶었다. 1년간 같은 옷을 입다보니 너무 신태환이 되어버렸더라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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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허은주·헤어·메이크업 청담 끌로에·의상협찬 닥스, 바나나 리퍼블릭, 미소페·장소협찬 St.Zio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