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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체위는 정상체위, 코언은 C·O·E·N
김연수(작가) 2009-03-12

영화 <파고>를 다시 보며 12년 전 <씨네21> 입사시험지의 최종답안을 쓰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대략 이런 가사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타향인걸. 가사가 좀 틀렸나? 아무튼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타향인걸. 고향 친구의 칼럼을 읽는데 내 입에서 이 노래가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정말 우린 타향이구나. 1995년에 먹고살기 위해서 한 주간지에 무모한 음반 비평을 시작한 이래 내용이 예고된 칼럼을 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찌하다보니 고향 친구가 됐지, 우리가 서로 타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여기서 구시렁대봐야 별무소용이고, 결국 나는 코언 형제의 <파고>를 다시 봤다.

역시 인생은 미완성인가 보다. 코언, 그러니까 영어 철자로 ‘시, 오, 이, 엔’, 코언 형제의,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그 영화 얘기가 아니다. 쓰다가 만 편지를 다시 쓰는 일에 대한 얘기다. 그러니까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본 건 1997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음울한 시절은 내게 김광석은 죽었고, 김소진은 죽기 전의 어떤 시기로 기억된다. 그 즈음, 나는 <새로운>이란 문학잡지를 창간하고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출간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바야흐로 한국 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이 펼쳐지는 줄 알고 광야를 질주하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 새로운 지평이란 첫째, 창간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는 새로운 전통의 잡지와 둘째, 소설에 정상체위가 아닌 색다른 체위를 묘사하면 소설가를 구속시킬 수 있다는 획기적인 판례였다.

정상(체위)적인 인간으로 살자는 결심

체위는 정상체위, 체위는 정상체위. 하루에도 몇번씩 그 말을 되뇌었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제부터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다른 체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오직 정상체위만. 그렇게 맹세하면서 나는 <씨네21>에서 뽑는 신입기자 공채에 원서를 냈다. 내가 보기에 다른 언론사와 비교해 <씨네21>에는 너무나 정상(체위)적인 기자들만이 근무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하면, 여러 기자의 얼굴이 떠올라서 말이 전혀 안되는 것 같고, 다만 영화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으니 거기서 일하면 돈 받으면서 영화를 공부할 수 있겠다는 얄팍한 속셈이 있었다.

그리하여 2차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명보극장(이 맞을까나? 이걸 확인하려면 지금은 퇴사한 박은영, 황혜림 기자의 증언을 참조해야만 할 듯)에서 코언 형제의 <파고>를 봤다. 아주 좋았다. 그리고 감격했다. 공짜로 봐서 좋았고, 벌써 <씨네21> 기자가 된 착각에 빠진 나는 앞으로도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런데 웬걸, 사회생활은 역시 힘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원고지를 나눠주더라. 그 원고지 8매 분량으로 리뷰를 쓰라는 게 2차 시험 문제였다. 아, 그 원고지 8매는 어디로 갔을까? 그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여기에 붙이고 한회 칼럼을 그냥 때우면 좋으련만. 아무튼 8매를 쓰라기에 딱 8매만 썼다. 원고지 마지막 칸에 마침표를 찍었다. 손을 들어 원고지를 더 달라고 말하는 지원자들을 보며 끌끌 혀를 차면서. 많이 쓴다고 돈 더 주는 거 아닌데.

그 8매에 과연 나는 뭐라고 썼을까? <파고>를 다시 보면서 나는 그게 제일 궁금했다. 1997년의 나. 이제부터는 문학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자고 결심하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좀 기자 체질이어서 뭘 쓰고 나면 머릿속에서 글로 쓴 내용이 고스란히 다 빠져나간다. 마감 뒤 내 머릿속에 남는 건 술, 달리기, 잠, 뭐 이런 것뿐이다. 강연이나 강의를 사양하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인데, 아니나 다를까 <파고>의 내용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뭐라고 썼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에 ‘시, 오, 이, 엔’ 코언 형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혼자서 꾸는 꿈이다. 인생이란 그렇게 혼자서 꾼 꿈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궤적이다. 친구가 타향이라면, 타인은 지옥인데 그게 다 혼자서 꾸는 꿈들 때문이다. 꿈은 본디 같이 꿔야만 한다. 1997년의 나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철자 때문에 나는 소설을 열심히 썼을까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느라 피를 뽑고, 빵을 먹은 뒤 나는 최종 면접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나는 혼자, 면접관은 다섯명 정도였다. 한쪽 끝에 조선희 편집장이 앉아 있었다. 조선희 편집장이 내게 물었다. 최근에 본 영화는?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세친구>입니다. 비디오 말고(비디오로 본 거 어떻게 알았을까나?) 없습니다. 말하지 않았던가, 돈 받으며 공부하려고 시험쳤다고. 세상에 총검술 배운 뒤에 입대하는 사람도 있는가? 어쨌든 질문은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질문. 코언 형제의 철자는? 그것만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시, 오, 에이치, 이, 엔.’ “당신이 권투선수를 원하면 나는 당신을 위해 링에 오를 거야.” 우리 정다운 블루스타임에 흘러나오던 노래 <아임 유어 맨>을 부른 레너드 코헨을 나는 좋아했으니까. 시, 오, 이, 엔입니다. 그리고 조선희 편집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파고>를 보는데 그때의 일들이 기억났다. 만약에 그때 ‘시, 오, 이, 엔’이라고 말했다면 <씨네21>에 입사할 수 있었을까? (아니, 피까지 뽑았는데 왜 떨어져? 그건 선배 피가 안 좋아서 그럴 거야. 직장 오래 다닌 소설가 편혜영이 말했다). 만약 <씨네21>에 입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안 하길 백번 잘했어요. 내 얘기를 들은 김혜리 기자가 말했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었을까?(고경태 편집장이 성격이 좋은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었겠지). <파고>의 결론은 경찰 마지가 내려준다. 모든 사건이 끝났을 때, 남편과 침대에 누운 마지는 혼자 중얼거린다. “돈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러니 나도 중얼거린다. “철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이 질문에는 다시 본 코언 형제가 대답한다. 철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각자 나눠가지게 될 2만달러 때문에 도합 다섯명을 죽이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철자 때문에 내가 소설을 열심히 쓰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2만달러나 철자가 없었더라면 그 뒤의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까지가 쓰다가 만 입사시험 문제 <파고>에 대한 최종답안이다. 채점을 다시 하고, 면접도 다시 볼 수는 없을까? 체위는 정상체위, 코언은 시오이엔, 지난 12년 동안 나는 한번도 그 사실을 잊어본 일이 없었는데. 여전히 정상체위가 아닌 다른 체위를 묘사했기 때문에 장정일이 구속됐다고 믿는 나는(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소설가를 구속시킬 수 있을까?) 내가 <씨네21> 입사시험에서 떨어진 건 철자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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