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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한나의 수치심까지 이해된 거야
김연수(작가) 2009-04-23

소설의 의문을 풀어준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와 케이트 윈슬럿의 광채

본디 이 칼럼이 고향친구를 떠올리며 영화에 대해 떠들어댄다는 취지로 마련됐다는 걸 잘 알지만, 오늘만큼은 그 정다운 얼굴이 좀 빠져주셨으면 한다. 오늘 난 오롯하게 케이트 윈슬럿의 얼굴만 떠올리면서 이 칼럼을 쓰고 싶다. 무려 27년 묵은 이 오랜 우정도 그녀의 연기 앞에서는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탑처럼 허망하기 짝이 없다. 고향친구가 광분할까봐 걱정돼서 다시 말하지만, 그녀의 연기 앞에서다. 예쁜 여자라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간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그러니까 요즘 제목으로는 <더 리더>를 몇번 정도 읽었을까? 영화를 보기 전에 다시 읽었으니까 이것으로 모두 네 번째다. 이 소설의 플롯은 한나가 그토록 감추고자 한 비밀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닫는 과정이다. 그래서 한번 읽은 사람이라면 다시 읽을 마음을 잘 먹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읽고 나니 한번 더 읽고 싶었다. 비밀 따위야 내가 알 게 뭔가! 이 소설에는 사춘기를 지나온, 책을 좋아하는 한 남자가 남은 평생 그리워할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공간, 그러니까 욕조와 책과 침대가 있는 방이 나오는데. 이런 조합을 두고 여관에 장기투숙하는 고시생을 떠올릴 오빠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래서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던가. 이번 칼럼은 케이트 윈슬럿의 얼굴만 생각하면서 쓰겠다고. 노스탤지어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한 상실감인지는 책에도 잘 나와 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왜 이리 슬픈 걸까? 잃어버린 행복 때문일까? 나는 그 뒤로 몇주 동안 행복했다.” 심지어 나는 그런 시절을 거쳐 본 일이 없는데도(아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진장 슬프기만 하다. 입술을 움직여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이미 먼 훗날의 슬픔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어떻게 미래의, 아직 오지 않은 슬픔이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일까? 물리학의 법칙으로는 불가능한 이런 일이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의심이 간다면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너는 정말 아름다워”라고 말해보라. 나는 이미 해봤다. 케이트 윈슬럿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자마자 무진장 슬퍼지더라.

이런 게 바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이런 게 바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다. 마이클이 처음 한나의 욕조에서 목욕한 뒤,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라고 말할 때, 이미 슬픔은 그 커플을 덮치기 시작했다는 사실 말이다. 둘만이 머무는, 세상의 모든 작고 어두운 방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미래의 슬픔은 꼭 그런 방들만 습격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열다섯살 꼬마는 이렇게 생각했다지. ‘때로는 나 스스로 어서 계속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함께 침대에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잦아들면, 그리고 지빠귀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부엌에 있는 색색의 물건들도 음영 속에 잠길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러 간 건 제목을 바꿔 새로 출간된 <더 리더>의 표지에 실린 한 여자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욕조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까지 내가 알던 소설 속 한나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나는 어느 정도 독일 여자를 상상했으니까. 게다가 내 상상 속에서 한나는 내면이 없었다. 소설은 1인칭이었으므로 나는 화자인 열다섯 소년의 마음에 감정이입했다. 한번도 한나의 입장에서 그 모든 일의 의미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누구지, 이 여자? 케이트 윈슬럿이야. 누군가 대답했다. 왜, <타이타닉>에 나온 여자.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궁금했다.

한나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훌륭한 관객은 아니었다. 책을 읽으며 혼자 상상할 때와 달리 마이클과도 감정이입이 잘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점 한나의 입장에 서게 됐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으니 그런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사무직으로 승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기 전, 그녀에게는 소년을 마지막으로 만날 기회가 있다. 미리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한나와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한나의 마음이 느껴졌다. 뭐야 이건. 지금까지 난 뭘 읽었던 거야?

소설을 읽을 때,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바로 한나의 수치심이었다. 그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 늙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는 걸 감수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건 한나를 평면적으로 이해했을 때의 단순한 의문일 뿐이었다. 케이트 윈슬럿의 연기는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에 영화를 보니 더이상 한나를 평면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한나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수치심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됐다.

마지막 재회 장면에서 홀딱 반하다

그리하여 이제 여기에 이르면 간신히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만든 이 멋진 이야기를 음미할 준비를 갖추는 셈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다음에 나온다. 한나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케이트 윈슬럿은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그래서 그녀의 처지를 이해한 내가 급기야 눈물을 주르르 흘릴 정도라면, 만약 그런 사람이 자신의 임무에 성실하게 임해 불쌍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죽였다면, 그녀가 저지른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건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던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의) 한나 아렌트의 의문이자, 사회적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괜히 고민할까봐 말씀드리자면, 그건 일년에 책 한권 읽지 않고 사색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두팔 걷고 나서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 그러니까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여기까지. 나는 케이트 윈슬럿에 대해서 좀더 말하고 싶다. 소설과 영화는 서로 다르다. 한나가 출옥하기 한주 전, 그녀와 마이클이 만났다가 헤어질 때. 소설에서는 한나가 마이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마이클은 한나를 안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식당 테이블에서 일어난 뒤, 마이클은 맞은편에 선 한나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지나쳐서 걸어간다. 한나는 그런 마이클을 보면서 여러 차례 주춤거린다.

그 장면에서 나는 알았다. 한나가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걸. 그 기억들이 실제로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들인지를. 그러니까 마이클의 몸을 통해서. 그를 안아본 뒤에. 그 장면의 연기를 보고 나는 케이트 윈슬럿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녀 덕분에 전혀 새로운 한나를 만나고, 내가 한번도 읽지 못했던 <더 리더>를 읽게 됐으니까. 고향친구는 여러모로 바쁠 것이다. 다음주에는 한번 쉬어도 상관없을 듯. 대신에 케이트 윈슬럿의 답장을 받고 싶은데, <씨네21>이여, 무슨 방법이 없을까? <센스, 센서빌리티>부터 볼 테니까 아예 칼럼 제목을 ‘나의 친구 그녀의 영화’로 하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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