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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폴 오스터보다는 애니 프루처럼

2집 앨범 <<지은>> 발표한 ‘인디계의 여왕’ 오지은

시이나 링고와 비욕의 어디쯤. 기괴하고 압도적인 음색, 19살 미만 청취 불가의 독한 가사. 혼자 작곡, 연주, 노래, 프로듀싱까지 다 하는 독한 여자애, 센 애. 가수 오지은의 수식어는 모두가 이토록 강했다. 그리고 2007년, 1집을 낸 뒤 음반을 제작하기 전 선판매한 특이한 음반 제작 방식으로 그녀는 배가 터질 정도로 칭찬을 먹었다. 향뮤직에서만 3천장이라는 기록적 판매고를 올렸고, 홍보 하나없이 공중파에서 출연요청이 왔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인디계의 여왕’ 오지은이 ‘지은’이라는 이름의 2집을 발매했다.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만을 재료로 한 단출한 1집의 특성을 버리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중엽, 디어클라우드의 김용린, MOT의 이언, 전자양 등이 세션으로 참여한 한층 스케일이 커진 밴드 음악이다. 이번엔 인디레이블 해피로봇사와 제대로 계약도 했다. 홍대 인디신의 주류 편입이 그녀의 두 번째 음반에 미친 영향에 대해 혹자는 세련됨을 평가했고, 혹자는 다듬어진 야생성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중독성있는 사랑의 노래, 정제된 13곡의 <<지은>>은 발매 한달 만에 ‘리스너’들의 필청 음반이 됐다. 오는 5월31일, 2집 발매 기념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 중인 그녀를 잠깐 불러냈다.

-혼자 전 과정을 해낸 1집과 달리 이번엔 레이블에서의 공동작업이다. =모든 과정을 끌고 가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대단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의 작은 틀어짐 같은 것들 말이다. 작업하다 보면 인간인지라 인풋하면 즉시 아웃풋이 안된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할 때가 많다. 그 스트레스가 심한 날엔 집에 가는 동안 오열하고 그랬다. 내가 왜 이걸 할까, 후회도 했다.

-1집의 부담이 더 크지 않았나. =그때의 부담은 지금과 좀 달랐다. 혼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컸다. 지원해주는 사람이 없이 하다보니 외로움도 있었고. 피로가 누적돼 대상포진에도 걸렸다. 그래도 지금은 ‘리스너’가 있으니 많이 행복해진 거다. “파이팅, 다음 앨범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 말이다.

-1집의 선판매는 얼핏 이해가 안 가기도 한다. 아르바이트로라도 모을 수 있었을 텐데 굳이 큰 모험을 했다. =음악을 하기 위해 딴 걸로 돈을 버는 건 아닌 것 같더라. 미담같이 들리지만 결국은 시간 낭비다. 나도 처음엔 10만원이나 모일까 정도로 기대했다. 한 가지 특징적인 건 그때 앨범을 산 사람들이 인디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다. 주문자 연락처에 ‘마포구’가 거의 없었다. 충북, 제주, 구로, 부산… 마포가 없더라. 그냥 우연히 클릭했는데 노래가 좋고, 그래서 주문한 사람들이다. 마포구 사람들에겐 오히려 어떤 필터가 있다. ‘어느 레이블에서 배출했고, 어느 가요제에서 수상하고, 어떤 가수가 칭찬한 누구래’와 같은 검증을 원한다. 그런데 별로 뜨지도 않은 낯선 가수가 선주문을 받는다니 괴짜 같은 거다. 흘려들어보니 ‘널 갈아먹고 싶다’ 이런 가사도 있다. 그러니 바로 ‘자의식 과잉인 여자아이군’하고 무시해버리는 거다.

-첫 입금받은 날 기분이 어땠나. =우와! 이거였다. 모르는 사람이 내 음반을 믿어준 거다. 신기했다. 그래서 오히려 머리를 쓰기 싫었던 것 같다. 잘나도 나고 못나도 나, 그대로의 나. 포장을 해서 이미지를 가지면 그걸 지키려고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다. 어릴 때부터 지켜본 음악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불행을 많이 봤다. 그래서 더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태도를 두고도 고도의 팬시함이라고 비판하더라. 나는 그럼 도대체 머리를 몇번 쓴 게 되는 건가. (웃음)

-중학생 때부터 무대에 서고, 밴드 활동도 했는데 혼자 작업을 고수한 건 인간관계가 안 좋다거나 신에서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 아닌가. (웃음) =왠지 독자적으로 내고 싶었다. 비트볼 들어가면 비트볼 색깔이 나오고 파스텔 들어가면 파스텔 색깔이 나오는 게 싫었다. 물론 그분들이 안 불러주셨지만. (웃음) 그런데 사실 레이블에선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가수를 물색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요즘 누가 괜찮다더라’ 이야기가 들리면 그제야 눈여겨보는 거다. 그런 입소문의 대상이 되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내 1집을 데모 취급하기도 싫었다. 게다가 난 인디신에 대한 선망도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공연하고 지켜보면서 그런 자각이 생긴 것 같다. 원 안에서 관찰하다보니 무대를 동경하는 소녀가 아닌, 무대 아래의 나나 무대 위 오빠들이나 모두 카피하는 사람이지 싶더라.

-대한민국 인디신 전체를 부정하는 위험한 발언이다. =‘틀을 깬다’는 거창한 목표라기보다 그저 편입되기가 싫었다. 주변 뮤지션들 보면 돈을 못 번다. 돈을 못 버는 이유가 제작비 들여서 손익분기점을 못 넘기고, 그걸 또 모두가 나누려다 보니 돈이 모자라는 거다. 내 앨범이 얼마나 팔린다고 남이랑 같이 나눠, 그런 생각도 있었고, 어떻게 하면 될지 답이 보이니까 굳이 같이 할 필요도 없다 싶었다. 친구들은 정말 열심히 활동하는데 돈이 1원도 없다. 근데 난 한장이 팔려도 내 만원인 거다. 인디펜던트하게 하고 싶었다. 정말로 인디펜던트하게.

-지금의 인디신 앨범 제작 방식과는 많이 다른데. =지금 인디신은 좀 복잡하다. 홍대가 인디신의 전부처럼 돼버렸다. 일종의 ‘마포구신’이 있는 것 같다. 10대 때 메이저 기획사에 잠깐 있었는데 메이저나 인디나 자본의 규모나 방향은 달라도 결국 같다. 사장이 참견하는 게 인디가 될 순 없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내 음악에 참견할 수는 없다. 어떤 퀄리티가 되건 그런 외부적인 압력이 없는 음반을 내야 한다.

-결국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앨범을 낸 방식 때문에 오히려 편견이 많아졌다. 센 애. 독한 애. 그런 유의 음악 외적인 선입견들이 생겼다. 세상사 원하는 대로 다 가져갈 수 없으니 괜찮다. 누굴 설득하려고 앨범을 낸 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이렇거든, 하는 마음으로 냈다.

-결과적으로 칭찬해주는 사람이 더 많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건데 왜 2집에선 그 방법을 고수하지 않았나. =이번엔 밴드 음악을 하고 싶은데 밴드 음악을 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회사에 들어가는 거다. 일이 많아지고 돈도 많이 필요하고. 그걸 내가 직접 했더라면 아주 힘들었을 거다. ‘나는 직접 다 하는 사람이야’라는 알량한 이미지를 지키려고 힘쓰고 생고생하기 싫었다. 그래서 더더욱 방식을 버리고 싶었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하는 거다. 지켜야 할 건 그것뿐이다. 이 회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줬다.

-그래서 2집은 더 야망이 큰 앨범이다. 1집 때 오지은을 특징짓던 ‘방식’에 대한 평가를 버리고 이제 철저히 음악만으로 부딪힌 거다. =1집이 내가 회사에 들어가도 변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패가 됐다. 이런 방식으로 내가 팔았더니 팔렸잖아, 그러니 내 방식으로 할게, 하고 주장할 수 있는 힘. 일종의 경력직 같은 거다. 어떤 특징으로 검증된 사람에게 다른 일을 시키지는 않지 않나. 근데 그게 없으면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1집의 야생성을 좋아한 사람에겐 매끈한 2집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부러 똑같은 구도, 똑같은 오지은인데 컬러에 화장만 한 상태로 커버를 제작했다. 음악도 똑같은 오지은이 바뀐 거다. 1집보다 밝아졌다는 사람도 있고 어둡다, 좋다 반응이 제각이다. 의도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밝아지는 물체라니 얼마나 좋은가.

-오지은의 경험이 결국 가사로, 앨범으로 나오는 음반이다. 사랑이 거의 100%를 차지하는데 요즘은 정색하고 사랑을 말하는 게 오히려 촌스러울 수 있다. =내가 문학도라서 그런가보다. 영화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난 내 마음을 치는 것이 좋다. 여러 사람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데 사람들을 보면서 그걸 솔직하게 가사로 쓰게 됐다. 꼬거나 비틀면 오히려 한도 끝도 없어진다. 뮤직 비즈니스를 보면 진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그게 되게 촌스러운 금기어다. 그래서 난 극한으로 솔직해지는 것이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다보니 곡을 쓰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조각조각의 노래가 모여 스토리가 됐다. 하나의 앨범이 스토리라면 이번 앨범은 어떤 스토리인가. =결국 이번 음반은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노래 중에 <인생론>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전에 장렬한 음악 나오다 로큰롤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만 그게 인생이다. <웨딩송> 나왔다가 <푸름> 나오는 게 인생이다. 기술적으로 들으면 갑작스러운 이 트랙이 뭐야, 하고 비판하지만 그냥 음악을 감정적으로 듣는 사람들은 반감이 없더라. 결국은 내 음악을 듣고 위로가 된다고 하는 리스너들에게 내 음악이 효용이 되는 거라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김완선부터 마돈나, 메탈리카 등 가리지 않고 음악을 들었다고 했다. =노래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옆집에서 만날 시끄럽다고 연락왔었다. 그래서 이불을 두겹씩 뒤집어쓰고 노래를 불렀다. 솜이불 두개 뒤집어쓰고 노래 부르면 그 자세가 쉽지 않다. 엄청 많은 트레이닝이 된다. 사실 이 바닥은 트레이닝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나. 보컬이라는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음반을 내고 그러다보니 무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CD랑 너무 다른 사람이 생기는 거다.

-음악이 아닌 에스파냐어를 전공한 건 의외다. =고1 때부터 4년 동안 내 음악에 대한 정의는 완성되지 않아도 하고 있었는데 전공을 하면 그걸 재정립당할 거 같더라. ‘너 틀려’ 하면 ‘내 발성인데 뭐가 틀려’ 이럴 게 뻔했다. 내 발성이 틀렸다는 건 내 얼굴이 틀렸다고 하는 거나 똑같은 말 아닌가. 그래서 전공 대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경험을 하고 싶더라. 커트 코베인도 학교 안 나왔잖나.

-그래서 경험으론 빠지지 않는다. 일본 연수로 번역 일도 했다고 들었다 =대학이나 직장 같은 정해진 것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나한테 맞는 길은 아니더라.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휴학하고 삿포로에 가서 2년 동안 지냈다.

-음악 공부하러 간 건가. =일본에선 오히려 음악 안 한다고 최초로 생각하고 갔다. 곡을 쓰기에는 내 경험이 너무 어설프고 무대도 즐겁지 않을 때였다. 음악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보자 마음먹었다. 순수하게 그쪽 음악신을 보니 예술적으로도 훌륭한데 오리콘 차트 1위하고 TV에 한번도 안 나왔는데 300만장 팔리더라. 이것저것 섞이고 꼬인 한국 인디신과 달리 일본 인디신은 그런 게 잘 정립돼 있더라. 그때, 아 역시 사람들은 좋은 음악은 찾는구나 하는 확신이 섰다.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성을 염두에 둔 건 확실히 그때의 깨달음이 컸나보다. =난 팝이 좋다. 그런데 세간의 팝과는 조금 다른 의미다. 전세계적으로 1천장 팔리는 음악이나 1천만장 팔리는 음악이나 나는 모두 같이 듣는다. 마니아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안 좋은 음악도 언젠가 나한테 좋아질 수 있다.

-이제 유명세도 조금씩 치르고 있다. =‘계발직으로 취직했는데 영업도 뛰어야 되는 거였어?’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다. 2집에 대해 “어중간하다”거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말 하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거다. 가끔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과민반응은 안 할 거다.

-최근엔 어떤 곡을 쓰고 있나. =밝은 노래들이 몇곡 있다. 그런 노래들을 모아서 내야 정규 앨범 3집 때 마음대로 다른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오지은스럽다가 절절한 여자애로 통하는데 그것에 반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 내가 스스로 내 이미지를 가두는 걸 경계한다. 어떤 생각이 나면 누군 술 마시러, 누군 자러 가지만, 난 음악하는 사람이니 후딱 곡을 쓰는 거다.

-그러니 역시 당신은 천재일지 모른다. =난 모차르트가 아니다. 곡을 쓰는 순간엔 딱히 노력하지 않지만, 곡을 쓰는 그 한 시간이 나오기까지 3개월 이상을 고민한 거다. 곡을 쓰는 건 그 시간을 고통스럽게 파는 작업이다. 괴롭고 싫고 찌질하고 관계 망치고. 그런 것들을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극한의 무엇이다. 소설가로 보자면 폴 오스터나 알랭드 보통처럼 문장력과 재치가 앞서는 것보다 애니 프루처럼 뭔가 뭉근한 정서가 좋다. 내 음악도 그랬으면 좋겠다. 무리하지 않고 멋있어 보이려 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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