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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충무로 금융자본,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2001-02-22

홈런이냐 안타냐 이것이 문제로다

◆튜브엔터테인먼트, 미래에셋, KTB - 영화판을 움직이는 금융자본들, 그들만의 자금운용 방식 지형도

바야흐로 영화계도 금융자본의 시대다. ‘포트폴리오, 리스크 셰어, 펀드,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생소한 단어들이 제작자들 사이에 자연스레 오르내린다. 최근 상황만 놓고보면 당연하게 여겨질 일이지만 불과 2∼3년 전만 해도 없던 현상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2000년 12월까지 출자하거나 출자검토중인 투자조합(펀드)만 9개, 금액으로 총 850억원 규모다. 100% 영화투자만 하는 펀드에서 40% 이상만 영화에 투자하면 되는 펀드까지, 성격은 다르지만 엄청난 금융자본이 영화계에 유입되거나 영화쪽 진출을 노리며 대기중이다. 한때 최고 인기직종으로 떠올랐던 펀드매니저가 영화계에서도 대접받는 자리가 됐다. 영화투자의 전문가들이 과거 대기업 영상사업 책임자들을 대체하며 높은 수익률을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파트너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잠시 넋놓고 있으면 어리둥절해질 만큼 영화계의 자본환경은 빨리 변했다. 지난해 시네마서비스가 미국계 다국적자본 워버그핀커스로부터 2천만달러를 투자받으면서 메이저배급사로 든든한 입지를 다졌고 CJ엔터테인먼트는 KTB네트워크를 비롯한 몇몇 금융사의 부분투자를 받은 영화들이 흥행하면서 시네마서비스와 대등한 위치가 됐다. 지금 상황은 한국영화시장을 시네마서비스와 CJ가 양분한 듯하지만 내막을 알고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양사 모두 자기자본만으로 움직이는 회사가 아니며 메이저의 자리를 노리는 제3의 인물을 막을 수 있는 장벽은 사실상 없다. 친소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고정자산 투자에 관심이 없는 금융자본은 오직 높은 수익률을 찾아 움직인다. 올해 흥행성적이 좋다고 내년에도 투자하리라 기대하기 힘들며 흥행가능성 높은 영화라면 어떻게든 한발을 담그려는 금융자본의 속성은 시장상황을 훨씬 흥미롭게 만든다. 일례로 지난해 <공동경비구역JSA> <단적비연수> 등 CJ가 배급하는 영화 6편에 47억원을 투자한 KTB는 “파트너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금융자본의 움직임이 영화시장의 판도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점치자면 일단 지금의 금융자본 지형도를 살펴봐야 한다. 창업투자회사가 업무집행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고 중소기업진흥공단, 영진위, 배급사, 비디오회사, 개인투자자 등이 돈을 모아 만드는 투자조합은 최근 금융자본이 영화에 투자하는 가장 일반적 형태. 대체로 5년간 운영한 뒤 결산하는 이들 투자조합은 돈을 벌든 손해를 보든 5년 동안은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투자자에게 일정한 수익률을 보장해야 하기에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이런 펀드들은 될 성싶은 영화에 부분투자하는 방식을 선호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딘 지 얼마 안 된 경우가 많다. 코웰창투나 MVP창투의 투자조합이 이런 성격. 코웰은 <청춘>(2억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5억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3억원), <인디안 썸머>(2억원), <친구>(5억원) 등에 부분투자했으며, 시네마서비스가 10억원을 투자한 MVP창투는 올해 1월 결성돼 아직 작품 선정을 못한 상태. 프로젝트별로 분산투자하는 이런 방식은 위험요소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지만 영화계에 깊숙이 뿌리내리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다. 괜찮은 영화를 선점할 가능성이 적기에 가장 소극적 투자형태라 볼 수 있다.

메이저 배급사를 목표로 대규모 자금 유치

정반대로 가장 공격적인 투자방식은 메이저 배급사를 목표로 삼는 경우다. 대표적인 회사로 일신창투 수석심사역 출신 김승범씨가 만든 튜브엔터테인먼트나 미래에셋에서 만든 코리아픽처스를 들 수 있다. 튜브는 “올해는 반드시 3강에 진입한다”고 장담한다. 지난해 12월 100% 영화투자를 위한 펀드를 만들었고 올해 15편 넘는 영화를 배급할 예정. 널리 알려진 대로 올해 제작비 50억원 규모 대작만 4편을 제작한다. 김승범씨는 메이저 배급사로 변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고 본다. 당장은 펀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영화별로 투자받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흥행수익과 배급수수료로 유지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 그가 이런 구상을 하는 건 “안정적인 수익은 유통에서 발생한다. 영화업계에서 코스닥 진출이 가능한 유일한 회사는 배급사”라는 판단 때문이다. 사실 그는 2년 전 일신창투에서 나와 튜브를 만들 때부터 펀드가 아니라 증자를 통한 확장을 시도했다. 시네마서비스가 워버그핀커스에서 투자받은 것처럼 회사에 대한 장기적 투자를 받겠다는 구상은 코스닥시장이 얼어붙은 탓에 한 차례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올해 흥행성적에 따라 김승범씨의 애초 구상이 실현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튜브는 조만간 국내 금융사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김승범씨와 함께 일신창투에서 영화사업을 했던 김동주씨가 대표로 있는 코리아픽처스도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50억원 규모의 펀드 2개를 만들어 <춘향뎐> <거짓말> <세기말> <아나키스트> <친구> 등을 제작한 코리아픽처스는 올해 규모가 큰 외화가 많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 레니 할린의 <드리븐>, 마틴 스코시즈의 <갱 오브 뉴욕> 등 올해 배급할 외화만 11편이 확정된 상태. 워너브러더스 계열 프랜차이즈, 뤽 베송의 프로덕션 릴루 등 2개 준메이저급 영화사와 협력관계를 구축했고 제작할 영화 2∼3편이 곧 확정된다. 튜브의 공격적 입장과 달리 김동주씨는 “조용히 지내겠다”고 말한다. 메이저가 되겠다고 공언하는 것보다 조용히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하다는 입장. 그러나 내부에 배급팀을 만드는 등 회사의 목표를 메이저 배급사로 설정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몸집은 작게, 움직임은 빠르게

반면 배급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100% 투자전문회사가 되겠다는 쪽도 있다. KTB가 대표적인 예인데 KTB는 지금까지 별도의 투자조합을 만들지 않고 영화투자를 진행했다. 하성근 엔터테인먼트팀 팀장은 “원래 KTB는 전문투자회사”라며 “앞으로도 제작, 배급을 외부에 맡기겠다”고 밝힌다. 삼성영상사업단 출신인 하성근 팀장은 “삼성 시절에 경험했지만 하려면 제작, 배급, 비디오, 방송까지 다 하든가 아니면 전문분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투자전문회사의 장점은 몸이 가볍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KTB는 현재 영진위, 부산시와 함께 투자조합 구성을 협의중이다. 올해 영화쪽에 130억원을 추가 투자할 예정. 사이더스 부사장 차승재씨가 공동운영자인 무한기술투자의 아이픽처스 역시 제작과 배급을 외부에 맡기는 투자전문회사다. 지난해 KTB가 CJ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처럼 아이픽처스는 시네마서비스와 싸이더스 우노필름이 파트너다. KTB와 다른 점은 시네마서비스와 싸이더스의 모회사 로커스가 아예 투자조합 결성에 참여한 주주라는 사실. 시네마서비스가 배급하는 영화와 싸이더스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투자될 확률이 그만큼 높다. 안정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한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 지난해 시네마서비스나 싸이더스가 좋은 실적을 올리지 못해 수익률이 낮았지만 크게 염려할 단계는 아니다. 메이저 영화사인 두 회사와 같은 배를 탄 이상 언제든 역전 홈런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싸이렌>에 투자한 삼성벤처투자는 첫 영화로 쓴맛을 봤지만 영화계에서 쉽게 발을 빼지 않을 전망이다.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에 45억원을 투자했고 메이저급 영화사와 협력관계를 맺는 것도 적극 검토중이다. 삼성 역시 전문투자회사로 직접 제작하거나 배급할 계획은 없는 상태.

국민기술금융에서 만든 KM컬처는 투자만 하다가 제작쪽으로 영역을 넓힌 특이한 경우. 소빅창투와 함께 100억원 규모 펀드를 만들었고 조근식 감독의 <명랑만화>(가제), 김영 감독의 <쥬크박스> 등 몇몇 신인감독의 영화를 직접 제작할 계획. LJ21, 다다필름, 아톰스엔터테인먼트 등 신생영화사에 시나리오 개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반칙왕>으로 성공한 KM컬처는 아직 신중한 입장이다. 박무승 대표는 “무리한 제작투자는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수익배분에서도 업계 관행인 투자사와 제작사가 6 대 4 혹은 5 대 5로 배분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입장. 전액투자시 제작사의 몫은 총수익의 20∼30%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작에 깊이 관련된 펀드로 대표적인 예는 드림벤처캐피탈이 있다. 유니코리아가 업무집행 업무를 일부 위임받은 드림벤처캐피탈은 유니코리아에서 제작하거나 투자한 작품에 투자했다. 제작사와 배급사를 연결하는 창구기능도 하면서 제작까지 병행하는 것이다. 아직 작품투자가 확정되지 않은 강제규필름의 벤처플러스 멀티미디어 투자조합도 비슷한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제규필름 입장은 “제작과 투자를 각각 독자적 영역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지만 자사의 활동영역을 넓히는 데 일조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제작뿐 아니라 극장, 배급, IT산업 등 관련분야로 뻗어가는 디딤돌이 될 전망이다. 일신창투는 애니메이션에만 투자하는 전문투자조합을 만들었다. 대원동화를 통해 수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등이 투자 대상이다.

신규자금 1천억원, 합리적인 운영이 중요하다

이외에도 투자조합 결성을 준비중인 곳은 많다. 멀티플렉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동양은 사업을 확장중이다. 올해부터 제작투자에 나서는 동양은 총 300억원의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당장 투자성과를 보긴 어렵겠지만 극장과 케이블방송이 뒷받침되고 있기에 주목할 대상이 되고 있다. 비디오출시사인 새롬은 독일의 애니메이션 방송사로부터 1500만달러 외자를 유치한 데 이어 50억원 규모의 펀드를 만들었다. KMAV 1호 벤처투자조합 명의로 모인 이 돈은 제작투자에 쓰일 예정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제작중인 기획시대는 자사가 제작하는 영화에 주로 투자될 100억원 규모 투자조합을 준비중이며 동아수출공사는 인터넷 벤처기업 비테크놀로지와 손잡고 300억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어림잡아도 1천억원이 훌쩍 넘는 신규자본이 영화계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지만 상황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매출규모가 1천억원을 조금 넘는 국내 영화시장 규모는 수익률 면에서 다른 벤처업종보다 나을 게 없다. 너도나도 <쉬리>나 <공동경비구역JSA> 같은 ‘대박’만 기대한다면 왜곡된 투자문화가 조성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펀드 운영자들의 능력이 발휘되야 할 곳도 이런 대목이다. 갑자기 늘기 힘든 시장규모와 제작편수, 제한된 스타와 예측가능한 흥행작, 배급시기와 조건, 인력발굴을 위한 사전투자 등 여러 가지 변수가 투자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펀드마다 운영방식이 다르고 목표가 다른 건 이 때문이다. 무엇이 정답인지 누가 장담하겠는가? 영화계는 아직 마그마가 부글거리는 활화산이다.

남동철·이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