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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스토리 12] 피묻은 쇠구슬이 눈가를 스칠 때…
박중훈(영화배우) 정리 주성철 2009-07-03

홍콩 누아르 팬들의 마니아적 지지 받았던 <게임의 법칙> 촬영 에피소드

<게임의 법칙> 개봉 1994년 감독 장현수 출연 박중훈, 이경영, 오연수

1993년 12월 말에 개봉한 <투캅스>는 다음해 2, 3월까지 흥행기록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1994년 4월 안성기 선배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정말 내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그때 일부 기자들이 내 결혼 예정 소식을 알고 있어서 공식적인 발표를 하라고 부추길 때였다. 그래서 생방송 수상소감으로 “저 6월에 결혼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으며 깜짝 결혼 발표를 했다. 그렇게 1994년은 정말 내 생애 최고의 해였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이른 나이인 29살에 결혼한 건데 그때도 참 철모르게 우쭐했던 거 같아 부끄럽다. 간절히 원하던 결혼을 하게 됐고, 세상 사람들은 다 나만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도 했고, 그러니 경사스러운 내 결혼식에 다들 와서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 고마운 주변 사람들에게 깊이 고마워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또 부끄럽다. 아직 서른살이 되기 전, 그렇게 흥분된 마음으로 1994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나의 시대가 열린 것 같은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던 수많은 시나리오가 나에게 섭외가 들어왔는데 다들 나이 좀 있는 역할은 안성기 선배, 그보다 좀 젊은 캐릭터는 나, 그렇게 설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유학을 떠나며 한풀 꺾였던 CF도 다시 연달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찍었던 뉴욕제과 외에 태창 BYC, 오리온제과, 고려제약 하벤 등 총 6개의 모델을 하게 됐다.

<태백산맥> 캐스팅을 거절한 사연

<투캅스>를 끝내고 다음 영화를 물색하는데 태흥영화사에서 <태백산맥>을 함께하자고 연락이 왔다.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님,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에다가 조정래 원작 <태백산맥>의 염상구 역할이니 더 볼 것도 없었다. 게다가 <태백산맥>은 임권택 감독님에게 있어 당시 1994년 <투캅스>에 앞서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던 <서편제>(1993)의 바로 다음 작품이니 예산부터 영화계의 기대에 이르기까지 최고 화제작이나 다름없었다. 나로서는 그저 캐스팅만으로도 영광인 작품이었다. 게다가 태흥영화사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를 했던 곳이니 평소 이태원 사장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 또한 컸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태백산맥>은 하지 못했다.

캐스팅에는 응당 출연을 결정하고, 개런티 협상을 끝내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발표를 하는 절차라는 게 있다. 하지만 나보고 하겠느냐는 물음에 ‘영광입니다’라고 답했고 ‘그럼 시나리오를 주십시요’라고 부탁드렸지만, 시나리오도 오지 않았고 구두계약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출연의사도 명확하게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당연히 개런티도 결정되지 않은 단계였다. 그런데 각 언론사에서 내가 염상구로 캐스팅됐다고 일제히 썼다. 단지 그 정도만으로도 내가 그 영화를 안 하는 일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규정이 돼버렸다. 정말 내가 자식뻘 되는 배우이고 나 역시 하늘처럼 존경하는 영화계 선배님이시지만 나로서는 굉장히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이지만 태흥영화사에 찾아가서 정중히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일을 하다보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에피소드일지 모르겠지만 절차가 무시당하면서 채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그렇게 규정돼버리니 너무 당혹스러웠던 거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까운 작품이고, 이태원 사장님께도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당시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게임의 법칙> 용대는 알 파치노적인 캐릭터

<태백산맥>을 하지 않게 되면서 장현수 감독을 만났다. 내가 전에도 얘기한 적 있지만 현수 형과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연기지망생 시절에 함께 만난 적 있다. 그때 현수 형은 <여왕벌> 등의 작품에서 연출부를 할 때고, 난 무턱대고 명보극장 근처 다방에서 만남을 청해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생이라며 자체 제작 명함을 건네며 출연을 부탁했던 거였다. 일개 연출부한테 무슨 권한이 있었겠냐마는 어떤 역할이건 배우를 꿈꾸던 나로서는 참 절박한 심정일 때였다. 그 뒤 장현수 감독이 만든 <걸어서 하늘까지>를 보고 옛 기억에 흐뭇하게 웃음도 지었고, 완성된 영화를 보고서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데뷔작이 받았던 호평에도 그의 두 번째 영화 <게임의 법칙>은 영화사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강제규 형이 쓴 필름누아르풍의 시나리오도 괜찮았는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마침 당시 나는 <투캅스>의 인기를 등에 업고 세양필름의 <계약커플>이라는 작품에 출연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그땐 내가 캐스팅됐다는 것만으로도 전액투자가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아무래도 <계약커플>은 나하고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양필름의 조창학 대표에게 <계약커플> 대신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 <게임의 법칙>이 만들어지게 됐다. 물론 <계약커플>은 별다른 공백없이 이종원, 김혜리 주연의 작품으로 완성돼 나중에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20대 배우의 당돌하고 맹랑한 제안이었지만, 마치 영화 속 ‘용대’처럼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깡’이 있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게임의 법칙>은 단관개봉으로 17만~18만 관객 정도를 불러모았고 이후 연말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았을 정도로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뒀다. 그렇게 강렬하고 거친 모습의 <게임의 법칙>은 내가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재능과 역량을 넓혀준 작품이라 기억에 남는다. 더불어 <게임의 법칙>은 마치 홍콩 누아르의 팬들이 그대로 다 옮겨온 것처럼 젊은 남성 관객의 마니아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빨간 피눈물 안약을 넣고 만든 라스트 신

<게임의 법칙>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카페이스>(1983)의 알 파치노를 내내 생각하면서 연기한 작품이다. 쿠바에서 건너온 토니(알 파치노)처럼 싸움만 잘하고 별 볼일 없는 밑바닥 인생인 용대(박중훈)가 오직 깡 하나만으로 조직에서 인정받고, 또 자기를 노리는 경쟁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지위가 상승된다. “나 지금 걸어가면서 전화하는 중이야!”라고 으스대며 휴대폰을 얻고, 양복 한벌 멋지게 빼입고, 보스의 벤츠를 운전하면서 그는 진짜 ‘싸나이’가 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토니와 용대는 외모와 습성, 목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재창조될 수밖에 없다. 알 파치노가 아닌 내가 바로 한국의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 용대를 만들어야 하는 거다. 그래서 촬영 내내 염두에 뒀던 그것이 특정 상황 속에서 과연 어떻게 서로 다른 패턴으로 재창조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했다. 아마도 나로서는 <투캅스>는 물론이고 이전작들의 느낌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기 때문일 거다. 어디까지가 재창조인지는 모르겠으나 훌륭한 창작자들의 창의적인 작품들을 많이 보는 것은 배우 개인의 창의성을 발견하고 발현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는 것 같다. 감독이 아닌 배우들도 고전을 많이 봐야 한다는 것, 좋은 작품들을 접하자는 얘기는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역시 <게임의 법칙>은 “사이판으로 뜨는 거야”라는 대사로 유명한 마지막 장면이 명장면이라고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런데 총알이 내 머리를 관통해 전화박스 유리창이 깨지던 장면 촬영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때만 해도 한국 특수효과에 대해서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한국 특수효과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고. (웃음) 다 된다고는 하는데 해보면 딱히 되는 거 없고 그렇다고 하긴 해야 하는데 아예 안 되는 것도 없고. 선배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환경이 열악했던 게 사실이다. 공중전화에서 전화 받고 있다가 바깥의 소년이 총을 쏘면 총알이 이마 관자놀이를 관통하면서 반대편으로 피가 팍 터지며 유리창이 깨지는 거다. 그걸 어떻게 촬영했냐면 긴 장총으로 내 눈알 바로 앞 불과 1~2cm 앞으로 조준해서 피 묻은 쇠구슬을 쏴 그게 반대편 유리를 깨트리며 탁 터지는 거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조준이 잘못되면 그냥 총알 같은 쇠구슬을 눈에 그대로 맞는 거다. 그렇게 터지고 나면 한손에 숨겨두고 있던 빨간 물감이 적셔진 붕대를 카메라가 안 보이게 슥 올려서 머리 옆을 꾹 눌러 머리 옆으로 피가 흐르게 한다. 전화박스 유리창이 깨져야 하는 거니까 무조건 한번에 OK를 낸 장면이었다. 그리고는 죽어 있는 용대를 부감으로 잡으며 페이드 아웃되는데, 나는 좀 더 욕심이 나서 내 얼굴을 한번 클로즈업해주면 피눈물을 한 방울 흘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그런 게 있어서 빨간 피눈물 안약을 넣고 그 장면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얘기하는 <게임의 법칙>의 라스트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경영 형을 다시 현장에서 만나고 싶다

<게임의 법칙> 하면 이경영 형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도박에 빠진 사기꾼 ‘인수’로 나와 서울로 가는 나를 등쳐먹고는 나중에 또 나로 인해 불구의 몸이 되고, 그 상태로 티격태격 한집에 살며 미운 정이 들어서는 마지막에 이르러 내가 죽을 것을 직감한 순간에는 한없이 오열했다. <머나먼 쏭바강>에서 처음 만났는데 참 눈이 선하고 예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땐 함께 참 많이 고생했고 <게임의 법칙> 이후에는 <할렐루야>(1997)에서도 함께 사기를 치는 친구로 호흡을 맞췄다. 당시 유명했던 유공 엔크린 CF도 함께 찍으면서 이 시기에는 같이 뭘 많이 했다. 엔크린 CF는 시리즈로 몇번을 찍었는데 ‘새 차니까’, ‘헌차니까’하는 광고에는 그가 자동차 운전자로, 내가 주유소 점원으로 나왔고 ‘내 차니까’하는 광고에는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친구로 나왔다. 내가 왜 굳이 이 휘발유만 고집하냐고 물으면 ‘내 차니까’라고 대답하는 거였다. (웃음) 경영이 형은 내게 참 좋은 친구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몫을 훌륭하게 해내는 한국영화계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배우라 생각한다. 그의 진실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는다. 여전히 오랜 고통을 겪고 있어서 가슴이 아프다. 함께 열정적으로 연기하던 그때로부터 세월이 한참 흘렀지만 경영이 형을 현장에서 배우로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는 내게 참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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