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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작으냐
2001-11-30

편집자

마약판매에 절대 반대하는 사람들도 중국에서 처형된 신 아무개의 일에는 분노하거나 한탄한다. 국가가 재외국민의 인권을 그토록 방치할 수 있느냐는 질책이 쏟아져 나온다. 필로폰 사용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최근의 황수정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한번 생각해볼 법 하다.

브라운관의 ‘청순가련’ ‘요조숙녀’가, 더구나 한사람의 ‘공인’이 이럴 수 있느냐는 도덕적 비난 앞에 그는 노출돼 있다. 공인이라면 공직에 있는 사람, 또는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분명 공직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텔레비전 드라마 출연은 공적인 일인가. 그의 연기활동은 그 드라마와 함께 대중예술의 영역으로 분류해놓아야 할 것이고, 연기라는 행위는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일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면 왜 그는 필로폰을 함께 마신 이보다 이목을 끄는가.(너무 답이 뻔해서 질문이랄 수도 없다.) 유명인이니까. 기업들이 상품을 팔기위해 그들의 유명함을 거액의 광고모델료를 내고 사듯이, 언론은 상품 그 자체인 자신들을 팔기위해 그들의 동정을 채취한다. 어디서나 그렇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마약을 했다, 치료를 받고 재기했다, 다시 마약을 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한국까지 날아온다. 그래도, 사용자보다 판매자가 주로 처벌되는 풍토 탓인지 전달하는 태도가 조금 다르다. 아니면, 사생활을 존중해야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의식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경우는 지나치게 과격하다. 이름의 환금성과 경제적 가치는 높아졌으나 그것이 인격으로까지 옮겨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존중받을 만한 일을 해야한다는 말은 일면 옳은 듯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존중하는 일은 언제나 모든 전제를 이겨내야 하는 법이라는 ‘원칙’을 안심하고 접어둔다. 수의를 입고, 오라를 찬 그 ‘여자’의 사진이 보내는 신호를 보라. 그 순간 우리에겐 “왕궁 대신에” 분개할 재료,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대신 증오할 대상이 제공된다. 분개 대신 조소, 증오 대신 경멸이라고 정정해야겠지만, 그런다 하더라도 참 우리는 얼마나 작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