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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스토리 13] “안 피운 걸로 믿고 싶습니다”
박중훈(영화배우) 정리 주성철 2009-07-17

<마누라 죽이기> 촬영 도중 맞닥뜨린 대마초 사건의 시련

<마누라 죽이기>에서 부부로 출연한 최진실과 박중훈

1994년 박중훈은 <투캅스>로 흥행 대박을 터트리고 <게임의 법칙>으로 과감한 연기 변신까지 보여주며 승승장구했다. 각종 영화상은 물론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 인생 최고의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해 10월 <마누라 죽이기> 촬영 도중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인해 생애 가장 큰 시련 또한 찾아온다. 결과적으로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다. 섭외가 들어온 영화들은 물론 여러 CF들까지 한번에 날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마누라 죽이기>는 촬영을 끝냈지만 심리적인 수감 상태가 계속됐다. 지금이야 대마초에 대해 합법화 논쟁까지 벌어질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유연해졌지만 그때는 달랐다. 연예인이라는 ‘공인’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여론의 포화는 계속됐고 사회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또한 견디기 힘들었다. 아마 결혼 전이었다면 ‘배우 박중훈’의 생은 거기서 끝이었을지도 모른다. 강우석 감독과 안성기 선배를 비롯한 주변 영화인들의 격려, 신혼 초에 날벼락 같은 일을 겪은 아내의 따뜻한 한마디가 큰 힘이 됐다. 그렇게 박중훈은 서서히 자신을 추스르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철없고 우쭐했던 젊은 날과의 확실한 이별은 그렇게 시작됐다.

<게임의 법칙>을 끝내고 배창호 감독님에게 연락을 받았다. 배창호 감독님 하면 <적도의 꽃>(1983), <깊고 푸른 밤>(1984),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80년대 충무로를 대표하는 분시고 나 역시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늘 함께 해보고 싶은 분이었는데 시나리오를 건네주시니 너무 기뻤다. 그게 바로 <젊은 남자> 시나리오였다. 한 남자의 야망과 성공, 추락을 그린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때는 <투캅스>를 함께했던 강우석 감독님이 다시 <마누라 죽이기>를 하자고 해서 무조건 한다고 구두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래서 촬영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9월부터 11월까지 도저히 두 영화를 함께 찍을 수 없었다. 배창호 감독님께 스케줄 조정이 가능하냐고 여쭤봤더니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부족해서 힘들 것 같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젊은 남자>는 정말 시간이 안 맞아서 못했던 작품이라 지금도 참 아쉽다. 배창호 감독님도 아쉬웠는지 작은 역할이지만 영화 속 영화배우 역할을 해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셔서 그건 흔쾌히 했다. <마누라 죽이기> 촬영 중에 짬을 내서 한 건데, 당대 가장 존경하던 감독님 중 하나였던 배창호 감독님 영화에 그렇게 짧게 우정출연이라도 하게 된 게 큰 영광이었다.

나의 절박한 답변에 검사도 웃더라

<마누라 죽이기>는 뭐 <투캅스>로 호흡을 맞췄던 검증된 ‘선수’들끼리 찍는 영화라 정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런데 영화 찍던 도중 내 생애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대마초 사건으로 10월에 구속이 돼 서울구치소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다. 나중에 ‘한국영화를 번성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젊은이로서 다시 기회를 준다’는 요지로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나오긴 했지만 당시 나에게 정말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어쩌다 알게 된 영어강사들하고 그렇게 된 거였는데 당시 <투캅스>로 승승장구하고 내 인생 최고의 시기가 열리면서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것 같다. 그 여파는 엄청났다. 신혼 초였는데 아내 앞에서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져 입원하신 것은 물론 대상포진이 와서 얼굴의 반 정도가 검게 덮일 정도셨다. 보건사회부 국장을 지낸 공무원으로서 그 누구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 분이셨으니 그 충격이 엄청나셨다.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내 소식이 <9시 뉴스>에서 북미회담 다음 뉴스로 나올 정도였다. 사건은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 사실 대마초는 굉장히 간단한 형사사건이다. 뇌물수수 같은 건 대가성을 입증하고 분식회계니 횡령이니 등 여러 시각으로 접근하고 밝혀야 하는데 대마초는 그냥 피웠나 안 피웠나로 따지는 거니까 너무 간단하다. 내 입장에서는 피웠다면 구속인 걸 아니까 피웠다는 얘기가 안 나오더라. 그래도 정황 증거 같은 게 있으니 완전히 시치미를 뗄 수 없어서 그때 뭐라고 대답했냐면 “안 피운 걸로 믿고 싶습니다”라고 했고 그게 나중에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의 대사로도 나온다. (웃음) 그걸 나중에 패러디해서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이 폭행문제로 얽혔을 때 안성기 선배가 “안 때린 걸로 믿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장면도 있다. 절대 장난한 게 아니고 절박한 상태에서 불쑥 나온 말이었는데 그 대답을 듣더니 검사도 웃더라.

모두가 등 돌릴 때 다독여준 그 분

그때 총 6개의 광고모델을 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태창BYC, 뉴욕제과 등에서 고소가 들어왔고 그렇게 제품 이미지 실추로 인한 수십억원대의 민사소송이 들어왔다. 자동차까지 가압류가 들어가고 내가 가진 집과 얼마 되지도 않던 다른 재산들까지 몽땅 날리게 됐다. 개런티는 어음으로 받았는데 어음 결제를 안 해주는 형식으로 날리기도 했다. 그렇게 소송을 당하거나 일부는 적당히 무마를 하면서 모든 회사로부터 문제가 됐는데 오직 동양제과 한 군데서만 고소를 안 했다. ‘젊은 사람이 실수한 거라 생각하고 우리는 기다릴 수 있으니 용기를 내’라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준 분이 바로 당시 동양제과 상무 혹은 부사장이었던 지금의 미디어플렉스 이화경 사장이다. 그분이 배포있게 그런 메시지를 주셔서 정말 절망적이었던 내가 조그만 힘이라도 낼 수 있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맙고 해서 그 뒤로 내가 쇼박스에서 무슨 행사라도 있으면 사람들 많은 데서 거의 ‘딸랑딸랑’하는 수준으로 안마도 해드리고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그 따뜻한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때는 여기 엔터테인먼트업계쪽으로 오실지 전혀 몰랐는데 하여간 정말 근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재기한 뒤 동양제과 후라보노껌 CF를 찍게 됐을 때 소액의 개런티로 보은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이 나를 향해 등돌리는 경험을 하게 되니 막연하게나마 ‘세상 인심’이란 것도 알게 됐다. 정말 많은 걸 배웠다.

대마초가 당연한 범법이라는 전제 아래 얘기하자면 지금은 대마초가 적법성에 대한 찬반양론도 있을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많이 개방됐지만 그때는 정말 가혹했다. 여전히 합법화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지만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대마초에 대한 형벌이 너무 가혹했다는 거다. 바로 구속이었으니까. 그때 ‘대마초 피우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어땠냐면 사회의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 퀭한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 구석에 웅크려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대마초를 입에 문 모습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정말 사회적으로 치명타를 맞은 거였다. 절망적이었던 건 <마누라 죽이기>를 촬영하던 도중에 잡혀들어갔다는 거다. 영화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가 되니 강우석 형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래도 다행히 구속적부심으로 나오게 돼서 영화는 예정대로 이어서 촬영하게 됐는데 그 촬영 자체가 의미심장했다. 내가 최진실과 다투다가 경찰서로 끌려가 감금된 세트 촬영이었다. (웃음)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그 신을 찍게 된 거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땐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난감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강우석 형이 참 고마웠다. 나로 인해 본인의 영화가 피해를 볼 것이 분명한데도 계속 나를 지지해줬다. 그 멘트를 그대로 옮기자면, 강우석 형이 몇몇 인터뷰에서 “박중훈은 7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배우인데 저렇게 되는 건 한국영화계의 엄청한 손실이다. 영화는 둘째치고 배우 개인에게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라는 식으로 얘기해줘서 참 고마웠고 큰 힘이 됐다.

삶의 전환점이 된 구치소 액자의 한 문장

구치소에 있던 일주일의 시간도 정말 잊을 수 없다. 3평 정도 되는 공간에 11명이 끼어서 자는데 존속폭행, 폭력상해, 조폭 등 정말 들어온 이유도 다양했다. 그런데 그때는 <게임의 법칙>이 개봉 중이었던 때라 다들 금방 들어온 미결수들이니까 거의 다 영화를 보고 들어왔더라. 영화 얘기도 해주고 하면서 그 ‘용대’ 캐릭터 덕분으로 나름 구치소에서 좀 편하게 지냈다. (웃음) 또 하나 웃지 못할 일은 안성기 형이 면회를 온 날이었다. 여전히 <투캅스> 인기로 난리일 때였는데 철창을 가운데 두고 한 캅은 면회를 왔고 또 한 캅은 죄수복을 입고 반대편에 있는 것 아닌가. 그때 성기 형 앞에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구치소 내부에 걸려 있던 액자 문구도 기억난다. “모든 잘못은 다 내 마음속에 있다”는 글귀였다. 그때 기억이 절실해서 남을 원망한다거나 하는 마음을 안 갖게 됐다. 이전까지 정말 우쭐대면서 살았다면 그럴 때마다 그 문구를 떠올렸다. 아, 그리고 또 기억나는 한분이 있다. 거의 세상이 무너져내린 것 같은 기분으로 구속적부심을 받으러 당시 서울지방법원으로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 걸어가는데, 교도관 한분이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네면서 내 손을 꼭 잡고 “박중훈씨도 실수 하지요?” 그러셨다. 나는 “네” 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이어서 “박중훈씨도 앞으로 다른 사람들 용서하면서 사세요”라고 얘기해주었다. 생각해보면 흔한 얘기일 수 있지만 그때 내가 처한 절망적 상황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생각해보라. 정말 뭔가가 내 가슴속에 확 박히는 것 같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종종 얘기해온 20대 때의 혈기왕성함과 자기중심적인 우쭐함 같은 것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승화하는 계기가 됐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 사람이 단련된다는 게 아마 그런 의미일 거다.

대마초 사건이 있었던 1994년, 나는 청룡영화상에서 <게임의 법칙>으로 남우주연상과 인기상을 동시에 받았다. 수사기관에서는 연예인인 나를 통해 일벌백계하는 효과를 내야 하는데, 그렇게 상을 받게 되니 약간 당혹스러웠을 거다. 나 역시 주는 상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마찬가지로 곤혹스러웠는데, 어쨌건 그 상을 받는 심정이 참 비참했다. 게다가 사건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 조사를 받고 <마누라 죽이기> 촬영이 끝나고 그러면서 불구속 입건으로 수사가 일단락되려는데, 그 사건 전에 있었던 밝혀지지 않은 대마초 수수사건이 또 불거진 거다. 그게 ‘박중훈 또 대마초’ 그런 식으로 언론을 타게 된 거다. 마치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대마초에 손댄 것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무슨 마녀사냥처럼 되더니 변명하고 회복하는 그런 수준의 일이 아닌 게 돼버렸다. 정말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거다. 순간의 실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나쁘게 돌아서게 되고, 그나마 얘기가 오가던 영화도 뚝 끊겨버렸고, 정말 집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민사재판 두개의 피고, 형사재판 하나의 피고인으로 집을 나서는 게 내 외출의 전부였다. 정말 고통스러웠다. 재판만 마무리되면 배우 생활 접고 이민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 박중훈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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