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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스토리 15] 도쿄 거리에서 “내가 니 아빠다”
박중훈(영화배우) 정리 주성철 2009-08-14

<깡패수업> 촬영중 만끽한 출산의 기쁨과 <아메리칸 드래곤> 로케이션의 추억

<깡패수업>에 함께 출연하며 절친한 사이가 된 박상민과 함께

<투캅스2>의 성공은 기뻤다. 이제 본격적으로 ‘박중훈표 코미디’라는 표현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투캅스2>를 끝내고나니 미국 유학가기 전 약속했던 동아수출공사 작품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총 3편을 하기로 했는데 앞서 <들소>라는 작품이 엎어졌으니 두편이 남은 거다. 그게 바로 이상우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였고 전문 사기꾼 장사기(오지명)의 하수인으로 나와 그의 돈을 빼돌리려 하던 ‘마고봉’ 역할이었다.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시나리오가 나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던 작품이다. 그래서 고백하건대 내 영화 중 유일하게 극장에서 안 본 영화이기도 하다. 이상우 감독도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죄송한 마음도 들고 그렇다.

차승재 형과 사우나 갔다가 ‘캐스팅’

<깡패수업>은 앞서 <돈을 갖고 튀어라>를 함께 했던 차승재 대표와 김상진 감독과의 의리로 하게 된 영화다. 내가 일본에서 숨어 지내는 조직의 중간 보스로 출연했고, 박상민이 성공을 꿈꾸며 무작정 일본으로 떠나는 풋내기 남자로 나왔다. 영화가 괜찮긴 했는데 컨셉이 코미디도 아니고 누아르도 아니고 좀 애매했다. 처음에는 문성근 선배와 나를 캐스팅하려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보니 중간 보스 역할을 좀 젊게 가고 그 밑의 남자를 더 어린 역할로 가자고 해서 수차례 거절했다. 그런데 차승재 대표와 워낙 형 동생 하는 사이다보니 그냥 사우나에서 만나도 캐스팅을 계속 함께 고민하게 됐다. 출연결정을 하던 날에도 둘이 사우나에서 ‘어떡하면 좋을까’ ‘그 친구는 어떨까요?’ 그런 얘기들을 계속 주고받다가 ‘에이 그럼 내가 할게요’ 그렇게 된 거다.(웃음) 차승재 형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형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이다. 우노필름으로 시작해 싸이더스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계의 대표 제작자로 우뚝 선 데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드러워지는 모습이 보기 좋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요즘 그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잘 될 것이다. 얼마나 각별한 사이냐면, 나의 첫 신혼집이 역삼동에 있는 복층 빌라였는데 복덕방 거치지 않고 승재 형에게 바로 팔고 이사 갔다.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으니 거의 형제 같은 사이나 다름없다.

<깡패수업>은 과거의 <바이오맨>과 <머나먼 쏭바강> 그리고 <아메리칸 드래곤> <현상수배> 등으로 이어지는 내 해외촬영의 잊지 못할 경험 중 하나다. 스탭들은 신주쿠 쇼칸도리에 큰 집을 빌려 합숙을 했고 나와 박상민은 게이오플라자호텔에서 묵었다. 도쿄에서 3, 4개월 정도 촬영하면서 외로운 타지생활을 하며 늘 붙어 있다보니 참 친하게 지냈다. 일단 상민이는 진짜 술고래다.(웃음) 정말 당할 사람이 없다. <깡패수업>에서 사실 내 분량이 상민이보다 적다보니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출연이라고 치면 하루 술 마시고 다음 날 회복하고 다시 출연하는 스케줄이 가능한데, 상민이는 매일 촬영하는 스케줄이나 다름없는데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셨던 것 같다. 대단한 스태미너였다. 요즘도 어쩌다 박상민을 만나게 되면 갑자기 그때 생각이 떠올라 서로 별 말 없이 눈만 마주쳐도 낄낄거리며 웃는다.

꽉 짜여진 스케줄, 시간 어겨 망신도

일본 영화현장을 경험하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됐다. 충무로 영화현장이라는 게 ‘정’은 있어도 아무래도 프로덕션 과정 자체가 꽉 짜여진 스케줄로 정교하진 못했다. 시간관념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런데 일본 현장은 시간 개념이나 계약 조건에 관한 내용들이 명확했다. 충무로 관습에 익숙해있던 나는 현장에서 망신당한 적도 있다. 7시 집합이면 7시 반까지 분장 마치고 그때부터 리허설 하고 8시부터 촬영한다. 하루는 내가 늦었다. 7시 25분 정도에 도착해서는 분장팀에게 분장을 빨리 좀 해달라고 했다. 물론 무례하게 얘기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한국에서 하듯 습관적으로 그랬던 거다. 그랬더니 내가 늦은 건 늦은 거고 어쨌건 자기는 분장 시간이 30분은 필요하다고 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냥 내가 25분 늦음으로서 다 그에 맞춰 늦춰졌다. 단편적인 사례이기도 한데 영화는 ‘해 떠있는 시간’이라는 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관념이 중요하다. 게다가 팀별로 철저하게 분업화돼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깡패수업>의 1996년을 잊을 수 없는 건 촬영기간 중에 아들 배승이를 얻었기 때문이다. <깡패수업> 찍으러 도쿄로 갔을 때 아내는 이미 출산을 앞둔 상황이었는데 몸 풀 준비를 하면서 친정인 나가노에 머물렀다. 마침 난 도쿄에서 촬영 중이었으니까 진통이 오면 바로 달려갈테니 연락하라고 말해둔 상태였다. 물론 제작진에게도 사전에 그런 양해를 구해뒀고. 그러던 어느 날, 오전에 진통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이미 낳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곳이 나가노의 소화병원이라는 곳인데 출산한 당일에는 산모와 아기를 면회할 수 없다고 하더라. 바로 가봐야 아내와 아이를 볼 수 없으니 다음날 내려가기로 하고 일단 도쿄에 있었다. 그렇게 내일 바로 내려갈 생각에 들떠 있으니 어찌 그리 시간이 안 가는 건지.(웃음) 서울로 전화해서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니 너무 좋아하셨고, 나도 이제 아빠가 됐다는 생각에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뭉클한 게 올라오더라. 당연히 그 날 밤 김상진 감독, 박상민과 아카사카 거리를 밤새 돌아다니며 술을 샀던 기억이 난다. “나도 아빠다!”하고 소리 지르면서 그 넓은 거리를 아이처럼 뛰어다녔다.

미혼인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할 얘기긴 한데, 다음날 아기를 보고는 좀 놀랐다. 분유 광고나 영화 같은 데서 보는 것처럼 태어나자마자 바로 예쁜 아기일 줄 알았더니 얼굴이나 손발이 쭈글쭈글하고 핏빛도 좀 남아있는 거다. 그런 아기를 안고서 정상인가 아닌가 불안했던 기억도 난다. 부끄럽지만 그게 내 아이를 본 첫 인상이었다.(웃음) 그래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그전까지 여러 힘든 일을 겪어오면서 느꼈던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아이의 온기를 느끼면서 어떤 책임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 나도 이제 아버지가 됐다는 생각 말이다.

버스만한 트레일러까지 주더라

다시 새로운 인기를 얻어가면서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꿈도 꾸게 됐다. 배우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보겠지만 그게 실제로 이뤄졌다. 당시 대우시네마에서 연락이 와서 미국 오라이온사와 합작을 해서 300만달러짜리 액션영화를 하나 찍자고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본격적인 합작 시대를 열어보자는 야심찬 제안이었다.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래곤>이었고 미국 개봉 제목으로는 <더블 엣지>(Double Edge)였으며 나중에 오라이온사가 MGM에 팔려서 MGM영화로 배급이 됐다. 무엇보다 상대역이 바로 <터미네이터>(1984), <에이리언2>(1986)의 마이클 빈이었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터미네이터>는 재수할 때 여자친구와 봤는데 걔가 마이클 빈에 흠뻑 빠졌었다. ‘카일 리스’라는 역할이었는데 걔가 나중에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며 얘기하면서도 계속 외국식으로 ‘카열’ 비슷하게 혀 굴리며 발음해서 상당히 질투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던 배우 ‘카열’과 드디어 한 현장에 서게 된 거다. 그래서 너무나 기억에 생생하다. 나를 질투하게 만들었던 배우지만 당연히 나 역시 정말 좋아했던 배우다. 아직도 영화에서 나이키 운동화를 찍 하고 매며 액션을 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메리칸 드래곤>은 일부 한국 자본이 투자되는 형식으로 100%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촬영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이뤄졌다. 스탭들은 앞서 역시 밴쿠버에서 촬영한 성룡의 <홍번구>(1995)를 작업한 팀이었다. <바이오맨>이나 <깡패수업>으로 경험했던 해외 프로덕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날 어떤 장면이 촬영되고, 출연배우가 누구이며, 어떤 장비와 특수효과가 사용되는지 자세하게 적어놓은 ‘콜 시트’(Call Sheet)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 받아봤다. 예상 그대로 빈틈없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현장이었다. 호텔은 롭슨 스트리트에 퍼시픽 팔러제이즈 호텔이라는 포시즌스 호텔 계통의 특급 호텔이었다. 좀 창피했던 기억은 ‘퍼디움’(perdium)이라고 개런티 외 체재비가 나오는데 그걸로 식사와 전화비 등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퍼디움과 별개로 미니바 등 호텔 내에서 사용하는 비용은 따로 또 써도 되는 줄 알고 막 썼다. (웃음) 나중에 체크아웃할 때 추가로 몇 백만원이 더 나왔기에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할리우드 진출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정말 바보짓한 거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버스만한 개인 트레일러도 주어졌다. 침대와 주방은 물론 소파와 욕실 등 정말 움직이는 집 그대로였다. 배우란 심한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다른 일에 신경 끊고 푹 쉬고 집중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개인 다이얼로그 코치가 있어서 영어 대사 연기도 일대일 지도를 받았다.

게다가 실제로 마이클 빈을 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위축돼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극복하고 멋진 파트너가 됐다. 그리고 사실 마이클 빈은 1990년대 들어 점차 내리막길로 접어든 배우라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다. 촬영할 때는 에너지가 넘치고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 배우였지만 쓸쓸한 뒷모습도 보았다. 애리조나 출신의 모델로 LA에서 운 좋게 <터미네이터>로 일약 톱스타가 되고 <에이리언2>와 <K2>(1991)로 승승장구했지만 이후 영화들이 실패하면서 그걸 이겨내지 못했다. 그런 슬럼프 때문인지 술도 거의 알코올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마셨던 걸로 기억난다. 한번은 트레일러에서 잘 준비를 하고 누워 있는데 위스키 한병을 들고 찾아왔더라.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함께 술을 마시며 밤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아메리칸 드래곤>은 퍼스트 클래스를 처음 타보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싱가포르 에어라인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왔는데, 영화든 광고든 전에는 비즈니스석만 탔었다. 게다가 밴쿠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퍼스트 클래스에 나 혼자만 있는 것 아닌가. 할리우드영화 한편을 끝냈다는 뿌듯함과 나 혼자 퍼스트 클래스를 독차지했다는 즐거움에 푹 퍼졌다. 그런데 조니워커블루가 서비스되기에 이게 웬일이냐 싶어 한병 가까이 마셨다. 평소에도 위스키 한병 정도는 마시지만 그게 비행기 안에서는 2, 3배로 취한다. 게다가 전날 꼬박 밤새우고 아침에 샤워 정도만 하고 짐 챙겨 나온 상태였다. 오버하다가 완전히 뻗어버린 건 물론이고 술기운에 오는 내내 7, 8시간 동안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토했다. 나를 알아보는 한국 승무원도 있어서 폼나게 탔다가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웃음) 공항에서 짐 찾을 때까지도 헤롱헤롱했다. 내 첫 번째 할리우드영화 <아메리칸 드래곤>은 위스키 한병에 비틀거리면서 집에 들어간 기억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다음은 <현상수배>다. <깡패수업>의 일본, <아메리칸 드래곤>의 할리우드, <현상수배>의 호주, 그렇게 나의 1996년과 1997년은 서로 다른 해외 촬영현장을 연달아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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