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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우아한 발끝의 감각
2001-02-22

숏컷...김지운 칼럼

한국축구를 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참담해지는 서글픔을 참아가며 봐야하는 장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힘차게 공을 잘 몰고와서 결정적일 때 허망하게 피식 쓰러지거나 볼을 뺏길 것 같으면 어떻게든 제쳐서 치고들어갈 생각은 않고 또 피식하고 쓰러지는 장면이다. 뭐 그 정도야 잘하면 파울도 얻어낼 수 있고 하니까 궁색하게 보이긴 해도 소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술없는 축구를 봐야 하는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내가 한국축구에서 가장 보기 싫은 것이기도 한데 골문 앞에서 터무니없는 슛을 날리고도 너무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라운드에 얼굴을 파묻고 머리를 쥐어뜯는 선수들의 애처로운 광경이다. 아무리 봐도 전혀 아깝지도, 아쉽지도 않은 슛이었는데 대체로 한국선수들이 마치 골 하나를 도둑맞은 사람처럼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떨 때는 마치 용돈 안 준다고 땡깡부리며 길바닥에 누워 발버둥치는 아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아, 선진축구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우리가 어떤 분야이든지 그 분야의 전문가를 보면서 느끼는 어떤 경외감이란 게 있고 감동이란 게 있고, 그런 것들이 아름답기까지 해서 전율감마저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정말 황망스럽기만 한 것이다. 패스 미스도 용서되고 드리볼 미스도 용서되지만 정말 이런 모습은 용서가 안 된다. 요즘은 카메라 기능도 좋아진데다 설치대수도 많아져 여러 각도에서 보여지는 엄청나게 빗나간 슛의 포물선을 현장 못지않게 짐작할 수 있는데도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만 더 정확히 맞았으면 골인인데 하는 표정을 지으며 처절하게 괴로워한다.

왜 그럴까? 유독 우리나라 선수들만 왜 저럴까, 하고 나름대로 고민해보지만 답이 안 나온다. 가끔 채널을 알 수 없는 케이블TV에서 보게 되는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보면, 또는 이탈리아 세리에A 경기나 독일 분데리스가 경기를 볼 때면 너무나 그림 같은 슛을 쏘고도, 골대 위를 깻잎 한장 차이로 빗나가는 자로 잰 듯한 슛을 쏘고도 뚱한 표정을 지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제자리로 뛰어가는 선수들을 자주 보게 된다.

프랑스의 축구 영웅 지단이나 브라질의 히바우두의 표정들이 대개 이렇다. 강자의 무감함이 이렇게 훌륭하고 멋있게 보일 때가 없다. 아니 쟤들은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슛을 날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을 수가 있지? 가끔 보여주는 제스처라는 게 씨익 웃거나 동료를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거나 시선을 떨어뜨린 채 제자리로 뛰어가거나 할 뿐 아무리 그림 같은 슛을 날리더라도 빗나간 건 빗나간 거다, 하는 무감한 표정이다.

축구는 발끝의 예술이다. 발끝 어딘가의 섬세한 감각과 고도의 예민한 신경세포로 승부를 짓는 스포츠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골인이거나 노골이거나지 골인일 뻔한 것은 없는 것이다. 축구실력이 형편없는 나라일수록 골을 놓친 것에 대한 표정이나 제스처가 크고 선진축구일수록 결과에 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그렇다.

가끔 영화이야기를 하면서 편집에서 삭제된 장면 중에 정말 아까운 것이 있다고 하거나, 그 장면만 찍었어도 얘기가 달라졌을 거다 등등 이러쿵 저러쿵 아쉬움을 토로할 때가 있다. 그런 얘길 하고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얼굴이 이만저만 화끈거리는 게 아니다. 골인이거나 노골인 것이지 골인일 뻔한 것은 없는 것처럼 결과에 나와 있지 않으면 그건 없는 것이다. 결과에 쿨해질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니 영화 만드는 솜씨란 게 축구선수의 발끝 감각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