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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이렇게 사실적인 개소리가 있나
김연수(작가) 2009-08-27

‘개구리 왕눈이’ 세대, <업>을 보고 리얼리티에 깜짝 놀라다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계속하는 말이지만, 2005년에 서울에서 국제문학포럼이 열린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실린 방문작가 리스트를 보니까 오에 겐자부로, 오르한 파묵, 게리 스나이더 같은 이름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소설만 읽던 사람에게 그건 세계적인 밴드가 총출동하는 록 페스티벌이나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작가들은 모두 한 사람이라는 점. 옛날에 고은 선생께서 미당 서정주를 두고 하나의 공화국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정말 작가는 혼자니까 반란이 일어날 일도 없고 그 공화국은 꽤 오래갈 것이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듀엣인가요?” 거기에는 응구기와 시옹고가 발제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저런 이름 때문에 생기는 애환은 나날이 깊어간다. 이건 H.O.T. 때부터 생긴 오래된 애환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전에 확인과정을 거치는데, 그때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 바로 쭝혀기와 쫑코남이다. 둘이서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다가 마침 텔레비전에 어떤 여성그룹에 관한 뉴스가 나와서 내가 물었다. “투네원은 예쁘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쭝혀기와 쫑코남은 나를 바라보더니 얼마나 ‘쫑코’를 주든지. 놀랍다는 둥 무슨 한의원 얘기하는 줄 알았다는 둥. 아, 진짜…. 기획사들이여, 그룹 이름 좀 그렇게 짓지 마시라. 어쨌거나 이런 지경이니 잔뜩 소심해진 내가 ‘유피’를 볼 생각이라고 말하자, 쭝혀기와 쫑코남의 표정은 차라리 평온하더라(젠장, 발음대로 읽어도 틀렸고, 알파벳으로 읽어도 틀렸고).

개망신 깔때기 쓴 더그의 표정이라니…

오랜만에 픽사의 새 작품을 봤더니 정말 놀라웠다. 연예기획사들이 ‘아이 돈 케어’ 하는 나 같은 사람은 <개구리 왕눈이> 같은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 구슬픈 주제곡, 생각나는가? “개구리 소년.”(여기까지 읽고 “빰빠밤!”이라고 따라 부른 사람들이 있다면 참 동병상련이다. 안쓰럽겠지만 우리끼리라도 끝까지 투네원이라고 부르자). 그랬던 만화영화가 픽사가 나오면서 천지개벽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 과장된 얼굴만 나오지 않으면 실사영화와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그래픽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게 대략 30년 정도의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 칼럼은 ‘이 세상은 나아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연중기획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을 보니까 분명해지더라. 탄압받는 왕눈이가 무지개 연못에서 울던 시대는 진짜 끝났다. 뉴스에 나오는 정부 관계자들을 보면 여지없이 개구리 왕눈이가 생각나긴 한다. 하지만 그건 다시 한국이 그런 시대로 돌아간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촌스러워서 그렇다. 촌스러워서 못 살겠다(“속아준 거짓말만 해도 수백번. 무릎 꿇고 잘못을 뉘우쳐. 아님 눈앞에서 당장 꺼져. 아이 돈 케에에에에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이 진보해지자, 만화영화는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게 됐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에서는 알레고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개구리 왕눈이>와 비교하면 분명하게 알게 된다. 칼 프레데릭슨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할 만한 그런 인물이다. 생김새가 남기남씨에 가까운 점만 빼면 소년 러셀도 픽사가 있는 캘리포니아에서는 흔히 만날 동양계 미국 소년을 닮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개들도 특수장치를 이용해서 말을 한다뿐이지, 실제 지구 물리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집에서 개를 키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개들의 사실적인 동작이 정말 놀라웠다. 특히 개망신 깔때기를 뒤집어쓴 더그의 표정은 인상적이었다. 그 난감하고도 슬픈 표정은 정말 사실적이었다. 그럼 점 때문에 나는 픽사의 제작자들이 목조주택의 무게를 지탱하려면 풍선을 몇개 매달아야만 할까까지도 계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봤다.

찰스 먼츠와 황우석의 공통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픽사 사실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먼 미래에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아무리 많은 풍선을 매단다고 해도 집은 하늘을 날 수 없을 것이며 개들의 목에 번역기를 매단다고 해서 그처럼 멋진 농담을 던지는 개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더 많은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대용량의 컴퓨터가 등장하는 등의 기술적인 진보 덕분에 만화영화는 이제 알레고리의 형식이 아니라 직접 현실에 대해서 말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칼과 엘리의 일생은 몇개의 중요한 순간들을 보여주면서 지나가는데, 그 부분에는 대사가 없었지만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엘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라는 진단을 받는 장면에서 주위의 어린이들은 왜 저러냐고 물었지만, 어른들은 대부분 그게 무슨 장면인지 아는 듯 보였다. 이건 몇개의 풍선이면 목조주택이 하늘로 떠오를 수 있을까는 질문과도 비슷한 얘기다. 그 장면은 <>의 등장인물들은 우리와 같은 현실 속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개구리 왕눈이>의 무지개 연못처럼 알레고리화된 리얼리티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리얼리티. 집이 하늘을 날아다니는데도 <>은 사실주의적 규약을 거의 어기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다른 만화영화보다 좀더 감상적인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리얼리티가 그렇게 좀 감상적인 곳이니까.

우리와 같은 리얼리티를 배경으로 만든 만화영화라는 점이 최종적으로는 찰스 먼츠라는 안티히어로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인물은 만화영화에서 좀체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이런 인물을 잘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던데) 황우석 박사 같은 경우. 나는 아직도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찰스 먼츠처럼 그분 역시 자기 인생의 알리바이를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는가. 진지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이런 복잡한 캐릭터를 자주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모험의 정신’이란 비록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에 굴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의 정신일 것이다. 그중 몇몇은 사기꾼으로 밝혀지고, 몇몇은 명예를 회복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뒤에도 우리는 과연 그 사람이 사기꾼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인물이 등장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은 충분히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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