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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친구 그의 영화] “까불지 마, 자 이제 까불어, 까불어”
김중혁(작가) 2009-09-03

영화 <국가대표>의 미덕을 중계방송 장면 해설자의 말에서 찾다

<국가대표>

그래, 내가 이상한 거다. 내일모레 마흔인 나는 어째서 ‘투네원’(일명 ‘2NE1’)의 멤버 이름을 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 돈 케어>를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부르는 것이며, 피트니스클럽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최신곡들을 모조리 다 알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KBS <남자의 자격-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에서 ‘아이돌 따라잡기’라는 걸 한 적이 있는데, 구성원 중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코미디언 이윤석마저 ‘샤이니’라는 그룹명을 듣고는 “빵 이름 아니냐”고 하더라(그건 ‘샤니’잖아요!). 확실히 내가 이상한 게 맞다. 내가 이상해진 건 궁금한 게 많아서 그렇다. 요샌 어떤 노래가 히트하고 어떤 가수가 인기가 많은지, 그런 게 늘 궁금하다. 궁금하면 찾아보게 되고, 찾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하면 즐기게 된다. 그러니 김연수군이 ‘2NE1’을 ‘투네원’이라 발음한다고 해서 쫑코 줄 생각은 전혀 없다. 궁금하지 않은 걸 어쩌겠나.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 계속 하는 말이지만(그래, 1년 내내 이름 이야기만 해보자), 나 역시 김연수군에게 쫑코를 먹은 일이 있다. 김연수군이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내가 “그 작가, 여자 아니야?”라고 물었더니 어찌나 깊은 한숨을 쉬며 쫑코를 주던지.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데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아 생긴 오해지만, 그래도 ‘요시다 슈이치’ 라니, 이름의 어감만으로는 독특한 외모의 매력적인 여자일 것 같지 않나? 나만 그런가? 하긴 이름의 어감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다. 지난주 김연수군이 언급한 작가만 봐도 오! 예! 겐자부로(오에 겐자부로)는 어쩐지 늘 긍정적이고 명랑할 것 같고, 오래한 파묵(오르한 파묵)은 한 100년 넘게, 너무 오래 글을 써서 폭삭 늙은 사람일 것 같고, 흥국이와 숑고(응구기와 시옹고)는 자꾸만 들이댈 것 같고…, 워워, 별로 안 웃긴 얘긴 그만하자.

<천하무적 야구단>의 약올리는 중계방송

아무튼 지난주에 이어 2주 연속 ‘투네원’을 언급하여 전국 어디에선가 ‘투네원’이라는 이름의 한의원을 운영하고 계실 원장 선생님의 명예를 실추시킨 점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린다. 투네원이라는 이름의 한의원이 없다면 이 기회에 하나 개원하면 좋겠다. 이름 괜찮은 것 같다. “눈과 귀와 콧구멍은 각각 둘이요, 팔과 다리를 합하면 넷이며, 몸은 하나이니, 2와 4와 1은 우리 몸의 근원이로다. 투네원! 전화번호 031-XXX-0241”이라는 광고 문구까지 떠오른다. 원장에는 최근 나를 무진장 웃겨주고 있는 KBS의 야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천하무적 야구단>의 캐스터 허준이 딱 좋겠다.

요즘 가장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천하무적 야구단>이다. 멤버 중에서는 이하늘과 마르코를 제일 좋아하지만, 허준과 김C로 이뤄진 중계방송진이 없다면 지금보다 재미가 훨씬 덜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C와 허준의 주고받는 대화가 압권이다. 처음에는 허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지 않았지만 요즘 그의 입담은 송곳보다 날카롭고 모래알보다 반짝인다. 그의 주특기는 상대팀 약올리기다. 연예인 야구팀인 ‘조마조마’와의 경기에서 허준은 상대방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힘을 쭉 빼놓는 역할을 했다. 투수 정보석이 1루에 견제구를 던지자 허준이 중계한다. “아, 정보석 선수 같은 나이면 견제구도 투구수에 들어가요.” 정보석이 웃으며 발끈한다. 중요한 기회에 배우 이종원이 타석에 들어서자 다시 허준이 중계한다. “이종원 선수가 41살이죠. 이제는 슬슬 노안이 오기 시작하는 나이거든요.” 타석에 들어선 타자도, 보고 있던 선수들도 힘이 쭉 빠지는 농담이다. 허준이 한마디 덧붙인다. “이미지상 돋보기를 쓰고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모두 키득거린다. 허준의 중계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MBC ESPN에서 중계하는 ‘연예인 야구리그’를 가끔 시청할 정도다.

김C와 허준의 중계가 재미있는 이유는 한쪽 편을 대놓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공정과 균형? 그런 거 없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대항전의 중계방송이 재미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보는 사람도 중계하는 사람도 다 같이 한국을 응원하니 박진감이 넘치는 거다. 스포츠영화에 나오는 중계장면 역시 영화의 박진감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스키 점프를 다룬 영화 <국가대표>에서도 중계방송이 영화의 큰 축을 이루며 관객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요즘 들어 웃긴 장면에 너무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대표>를 보다 가장 심하게 웃었던 장면 역시 중계방송이었다.

신파로 빠지지 않은 <애국가> 장면 좋았어

우선 해설자로 나온 배우가 누군지 모르겠다. 아니, 배우가 아니라 진짜 해설자인가? 배우인지 해설자인지 헷갈리지만 명대사를 남겼다. 덜렁대는 성격의 최흥철 선수(김동욱)가 1차 시기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팀 점수를 깎아먹었고, 2차 시기를 맞았다. 해설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선수, 까불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까불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최흥철 선수가 점프를 했고, 착지를 앞둔 결정적인 순간 해설자는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야, 까불지 마, 까불지 마, 까불지 마.” 아, 나는 그 어디에서도 ‘까불지 마’라는 말을 이렇게 처절하게 외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까불지 마’라는 말이 이렇게 눈물나는 말인 줄 몰랐다. 완벽하게 착지하고 나자 해설자가 조금 느긋해진 목소리로 외쳤다. “아, 좋아요, 이제 까불어도 돼요. 까불어, 까불어, 까불어.” 해설자의 표정과 해설을 듣다가 나는 쓰러지며 웃었다.

<국가대표>라는 영화의 미덕이 해설자의 말에 녹아 있다고 생각했다. 까불다가 까불지 않다가 다시 까부는 영화의 리듬이 관객을 즐겁게 했다. 감독은 해설자처럼 정확하게 그 지점을 짚었다. 영화를 보다보면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마지막 <애국가> 부르는 장면이 딱 그렇다. “까불지 마, 까불지 마, 까불지 마, 울지는 말고, 울지 마, 울지 마, 자 이제 까불어, 까불어, 까불어.” <애국가> 장면이 신파로 빠지지 않은 건 보기 좋았다. 영화가 신파로 빠지지 않은 것도 보기 좋았다. <국가대표>에 신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신파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