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쐐기를 박는 작품 <애자>
이화정 2009-09-09

synopsis 스물아홉 애자. 고교 시절엔 ‘부산의 톨스토이’로 이름을 남겼지만,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서울 생활이 녹록지만은 않다. 지방신문 당선 경력은 억대 공모전 수상에 태클을 걸고, 바람 피우다 걸린 남자친구 때문에 속 끓이기 바쁘다. 무엇보다 애자를 피곤하게 만드는 건 부산 사는 엄마 영희. 공부 못하는 오빠만 유학 보내줘 어릴 때부터 애자의 심기를 건드리더니 이젠 나날이 결혼 독촉 하느라 바쁘다. 자신이 사고뭉치 딸인 건 생각도 않고 엄마에게 지겨움을 토로하던 어느 날, 엄마가 쓰러졌다. 그리고 말기 암으로 고통받는 엄마와 그걸 지켜봐야 하는 딸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엄마와 딸을 잇는 끈의 점성은 어느 정도일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쫀쫀하게 얽혀 있지만, 사실 이 관계는 너무 평범해서 굳이 설명을 하는 것도, 규정하는 것도 구차할 지경이다. 늘 곁에 있다고 믿는 엄마는 이 세상을 지탱해주는 일종의 버팀목 같은 존재다. <애자>는 바로 평소 간과하고 지나쳤던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쐐기를 박는 작품이다. 늦기 전에 결혼하라고, 제대로 사람 구실하라고 연일 잔소리만 거듭하는 엄마. 그리고 그 엄마를 지긋지긋해하는 딸. 유머러스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애자>의 전반부는 그래서 나에게도, 옆집 누구에게도 해당할 수 있는 별스럽지 않은 일상이다.

정기훈 감독은 이 대수롭지 않은 나날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좀 독한 방법이지만, 엄마의 죽음을 상정하고 나선 것이다. 갑작스레 닥친 비극이 생각처럼 처연하진 않다. 죽음을 맞기 전 엄마의 병치레는 여전히 가족에게는, 그걸 책임져야 할 딸에게는 통과해야 할 일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애자의 심경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다가올 엄마의 부재가 점차 기정사실화되는 순간, 영화는 기존의 유머러스함 대신, 장중한 슬픔을 제공한다. 그 과정에서의 울음은 꾸며낸 것도, 어떤 방식의 카타르시스도 아니다. 클라이맥스에서 관객이 겪는 슬픔은 애자의 엄마가 아닌 자신의 엄마를 향한 유사체험이다. 어느 순간에서라도 ‘밥은 먹고 다니냐’고 걱정해주는 세상 유일한 사람은 엄마밖에 없다는 가슴 뭉클한 깨달음. 애자라는 한 여성의 성장담을 통해서 감독은 그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 결과, 자극적이지 않은 전개지만, 이 영화가 전해주는 파도의 자장은 생각보다 더 크고 깊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녀만이 겪는 디테일한 에피소드와 감정선을 잡아낸 건 남자감독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