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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리] “술은 소박한 판타지를 제공해줘”
김용언 사진 이혜정 2009-09-11

소설가 전아리

아직까지 전아리를 설명하기 위해선 중·고등학교 시절 대산청소년문학상, 푸른작가청소년문학상, 정지용청소년문학상, 토지청년문학상, 계명문학상 등을 휩쓸었던 이력을 빼놓고 얘기할 순 없을 것이다. 이제 20대 중반으로 막 접어들고 있지만, 언론에서 호들갑스럽게 붙였던 ‘문학천재소녀’라는 라벨은 최근의 수상 경력으로 조금 더 공고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아리는 장편소설 <직녀의 일기장>으로 제2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고, <구슬똥을 누는 사나이>로 디지털작가상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외다리자전거를 타는 광대의 슬픈 러브스토리와, 낯익은 동네 아저씨에게 성폭행당한 소녀의 고통과, 몰락한 연극배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녀의 날선 분노와, 집나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꽁꽁 묻어둔 채 도벽으로 세상에 응수하는 어린 소녀의 성장기와, 아내가 집을 나간 뒤 우연히 발견한 토끼 의상을 뒤집어쓴 채 토끼의 삶을 사는 사내의 삶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From Now to Eternity’. 전아리의 손목에 새겨진 문신의 문구였다.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좋아하는 건가… 라고 물어봤지만, 그냥 그 문구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대신 원제인 ‘From Here To Eternity’에서 ‘여기’를 ‘지금’으로 살짝 바꾸었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전아리는 그 무한대의 시간 속에 숨어들어간 온갖 슬픔과 기쁨과 러브스토리를 지금도 글 위에 부지런히 옮기는 중이다. 평소엔 말이 (지나치게) 없다가, 종이 위에서만큼은 그녀는 달변가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다독가였다고 들었다.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특별히 없는데….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 분위기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주었다. 사촌언니, 오빠들이 읽던 에이브 전집 같은 걸 대물림해서 많이 읽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만화책도 많이 봤고.

-오, 에이브를 알고 있다면 혹시 에이스 문고도 읽었나. =읽었다. 긴 거 되게 좋아한다.

-언제 처음 ‘난 작가가 되겠어’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나.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작가가 되겠다고 갑자기 마음먹은 건 아닌데,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 출판 만화의 스토리도 쓰는 등 작가로서 착실하게 활동해왔다. 혹시 그 시절 글을 쓸 때의 쾌감을 기억하는가.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쾌감을 느끼는가.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땐 뭐 그냥 재밌다, 재밌다 하면서 썼던 것 같다. 80%는 거의 내 상상력에 의지해서 써내려갔으니까. 요즘은 좀 다르게 느낀다.

-어떻게 다른가. =예전엔 내용을 만들고 상상하는 재미가 컸는데, 요즘엔 그것 외에도 문장을 만들고 배열하고 쳐내는 그런 구성의 재미가 더 크다.

-단편집 <즐거운 장난>은 2006년에서 2008년 사이에 쓴 글들을 묶었다. 그때의 단편들과 지금의 장편의 느낌이 다르다. 그때는 리얼리즘에 대한 천착이 강했던 거 같더라. 소설가들의 가이드북을 보면 ‘절대로 네 생각을 늘어놓지 말고 묘사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즐거운 장난>의 단편은 그런 가이드를 충실히 따르는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 읽는 걸 좋아해서 묘사하는 기법을 즐겨 쓰는 편이다. 예전에만 특별히 그렇게 묘사를 많이 썼다기보다 단편은 짧으니까 묘사를 많이 넣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넣는다. 하지만 장편소설에 묘사가 길게 들어가면 읽는 사람이 피곤해하니까 잘 안 넣는다.

-단편들의 경우, 한국의 평범한 10대 소녀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넓은 범위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 묘사라는 게, 어느 정도는 체험이라든가 선행하는 지식이 있어야 구체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많이 물어봤을 것 같다. 진짜 겪어봤냐, 어디까지 알고 썼냐는 궁금증들 말이다. 과연 본인의 경험치가 어디까지 녹아들어가 있는지. =작품 나름인데, 자료를 취재해서 쓰는 것도 있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있다. 중간중간 메우는 부분들은 거의 다 상상이다.

-취재를 어떻게 하는데. =그냥 찾아가서 일하는 거 물어보고…. 내가 워낙 말을 짧게 하는 편이라 힘들지 않나. (웃음)

-안 그래도 지금 식은땀이 난다. (웃음)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하려나. 단편 <강신무> 같은 경우, 무당춤사위를 묘사하는 부분이 무척 생생한데 이런 경우엔 직접 본 건가 아니면 다큐멘터리 등을 참고한 건가. =굿하는 걸 직접 본 건 아니다. 책이랑 자료, 사진 찾아서 읽고, 무당을 만나서 얘기 듣고. 점보는 거 되게 좋아한다. (웃음)

-단편에서 처절하게 불행한 사람들이 자주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런데 결말에서는 또 희망에 가까운 쪽으로 끝이 난다. 이게 작가 본인의 의지인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결말은 거의 흐름을 타서 쓰기 때문에 일부러 긍정적으로 쓰려고 한 건 아니다. 그냥 그런 걸 좋아하는 편이다. 완전한 반전이 있는 스릴러가 아닌 이상, 특히 단편에선 현실과 어느 정도 화해하는 이미지로 쓰는 쪽을 선호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는 편인가. =공감보다는 오히려 그냥 관찰자 입장에서 많이 보는 것 같다. 공감하면 쓰기가 더 힘들다. 일상에서 만나거나, 혹은 지나치면서 보거나 할 때는 관찰자 입장을 고수한다.

-10대 시절에는 원하는 것 이상으로 타인의 시선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청소년소설대회에서 상도 워낙 많이 받고, 문학청년들의 레전드로 불렸다는 소문도 있던데. (웃음) 선망과 호기심만큼이나 질투와 의혹의 대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곤혹스러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절했을지 궁금하다. =그런 거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다고만… 그리고 얘길 들어봤자 직접 만나서 듣는 게 아니니까. 거기 휩쓸릴 시간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더더군다나.

-고등학생 때 많이 바빴나보다. =그땐 공부하면서 글을 쓰니까, 좀 정신이 없었다.

-그럼 글은 주로 언제 썼나. =거의 밤에. 도서관 갔다 와서 새벽까지.

-그런 식의 생활의 분리가 괜찮았나. 원하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그냥 시간 날 때가 밤 시간밖에 없으니까. 그런 생활 때문에 초조하기보단 졸렸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니까, 수업 시간에 졸긴 했다. 대학에 빨리 가고 싶었던 게 많이 자고 싶어서 그랬다. (웃음) 요즘은 많이 자서 좋다.

-그럼 대학 와서는 글쓰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나. =더 많아졌다. 훨씬 여유롭다. 쓰고 싶을 때 쫙 쓰고, 쉬고 싶을 땐 계속 놀고.

-현재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문학을 전공할 때, 뚜렷한 지향점은 아니라도 막연한 호감은 있었을 텐데. =다른 언어를 좀 배워보고 싶었고, 불문학이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것 같아서 좋아했다. 근데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지금 후회하고 있다. 그냥 국문과에 갈걸. (웃음)

-그럼 전공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프랑스 작가가 있다면. =거의 고전 작품들을 배우니까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없다. 시쪽엔 좀 있다. 혼자선 잘 안 읽게 되는 시를 새롭게 공부하게 되니까.

-예를 들면 누군가. =딱히 누군가를 꼽을 수 있는 건 아니고, 읽으면서 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외국 시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 싶다. 시대적인 상황이나 작가 개인사 같은 부분이랑 연결해서 읽으면 재미있는 것 같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웃음)

-수상경력을 보면서 청소년소설대회가 그렇게 많았나 깜짝 놀랐다. (웃음) 혹시 처음으로 수상했을 때의 기분이 기억나나. =처음 받았을 때와 지금 받을 때와 기분은 똑같다. 내 글에 대한 평 읽어보면서 아 좋다… 하는 정도.

-얼마전에 <즐거운 장난>과 <시계탑>이 한꺼번에 출간되었을 때의 기사들을 보면, 프로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표현이 나오더라. 워낙 어릴 때부터 글을 썼기 때문에 본인이 느끼기에는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어릴 때부터 항상 프로라고 생각하고 썼던 거 같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잘 모르겠다. 직업인가 아닌가를 떠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글이니까 그런 자세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전업 작가다 아니다의 차이가 또 생겨날 텐데, 거기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꼭 소설만 쓰겠다는 건 아니고… 아직 젊으니까, 글쓰는 쪽으로 해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고 싶다.

-장·단편에 따라 글쓰는 형식도 달라진다고 아까 얘기했는데, 선호하는 건 어느 쪽인가. =좀 다르다. 단편에선 기교를 부리면서 쓸 수 있는 메리트가 있고, 장편에선 일단 얘기를 들려주는 즐거움 같은 게 있다. 요즘엔 장편쪽이 좀더 좋다.

-최근작 <직녀의 일기장> <시계탑> <양파가 운다>에선 또래 여자애가 화자로 나온다. 단편들의 화자는 워낙 다양한 계층과 성별과 연령대를 아울렀는데, 확실히 또래 소녀가 나올 때는 작가도 좀더 풀어놓고 쓴다고 할까, 경쾌한 느낌이 있다. 쓰는 입장에선 어떨까. 자기랑 가까운 쪽에 있는 사람을 화자로 내세울 때와 아닐 때의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그쪽이 아무래도 심리묘사가 좀더 디테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캐릭터 중 본인이랑 가장 가깝다고 느껴지는 인물이 있나. =다들 조금씩 들어가 있기 때문에 골고루 애착이 있다. 하지만 난 원래 글을 다 쓰고 나면 전부 털어버리는 편이다.

-<직녀의 일기장> <시계탑> <양파가 운다>의 경우, 주인공 성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애써 빈정거리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과 애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나름의 유머 감각으로 불행을 돌파해가는 카테고리에 있다는 느낌은 있다. 또래 여자를 설정할 때 선호하는 캐릭터는 그런 소녀들인가. =맞는 거 같다. 좋아하는 코드들이 그쪽에 가깝다.

-<구슬똥을 누는 사나이>에서 토끼 옷을 입은 남자는 단지 토끼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 예전 같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는 ‘토끼의 삶’을 살게 된다. 본인에게도 그런 가면을 걸치면서 또 다른 내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글쎄, 주인공이 토끼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그가 발견한 옷이 타조나 공작새 옷이 아닌 토끼 옷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받은 상금으로 여행하고 싶다고 한 인터뷰를 읽었다. 여행 많이 다니는 편인가. =사실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웃음)

-글을 보면 공간에 대한 디테일이 되게 생생해서, 혹시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 아닐까 싶긴 했다. =갔던 데만 자주 간다. 낯선 곳에 가면 기가 많이 빠지는 체질이다.

-<직녀의 일기장>에서 가족끼리 펜션 여행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는 건가. (웃음) =하하, 여행을 가면 좀 그런 편이다. 거의 숙소에만 머무르는 편이다. 주변 사람들도 다 그런 캐릭터고. 혼자 여행 갈 때는 좀 돌아다니고 구경다니다가 다시 호텔방에 앉아 술을 마신다. (웃음)

-안 그래도 작품들마다 음주장면이 상당히 다채롭게 등장하더라. (웃음) =술자리를 좋아한다. 알코올은 소박한 판타지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여자주인공의 친구들을 묘사하는 게 참 재밌다. 현실감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발랄하고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럽다. 분명 이런 친구들이 주변에 많을 것 같은데. =주변에 그런 친구는 없다. 그냥 내가 조연에 신경을 많이 쓴다. 조연이 재밌어야 이야기도 재밌어지는 것 같다.

-10대 시절에도 ‘문학청소년천재’라는 식으로 불리고, 20대가 되어서도 청소년 전문 소설 작가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것에 답답증은 없는지. =주변에선 그런 말씀 많이들 하신다. 그런 타이틀 빨리 벗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계속 글을 쓸 거고, 다른 게 나오면 자연히 타이틀이 바뀔 테니까. 그땐 그런 글이 좋아서 쓴 거고 나중엔 어떨지….

-타인에게 읽히는 글, 이라는 특성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요즘의 거대한 흐름이 이런 쪽이다라면 관심 갖고 보는 편인지. =요즘 사람들의 시선, 관심사에 신경을 많이 쓴다. 드라마나 영화가 워낙 재미있으니까, 책을 사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까, 뭘 기대하고 있을까를 찾아본다.

-그럼 요즘의 흐름이 어떤 쪽이라고 생각하나. =일단 지루한 걸 싫어하고, 무조건 재밌는 책을 선호한다. 감동이든 웃음이든.

-요즘도 다독하나. 혹시 소설만 읽나. =여전히 많이 읽는다. 취향은 그때그때 변한다. 소설 외에도 많이 읽고. <명품 대화법> 같은 것도 봤다.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웃음)

-가장 최근에 관심가는 작가나 책을 소개해줄 수 있을까.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다. 거부감이 드는 소재일 수도 있는데, 겨울날 얼음판처럼 차갑고 청명한 느낌의 구성과 문체가 소재의 충격을 뛰어넘어 작가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 같다. 멋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기 위해, 작가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단련 중인가. =뭐 일단 새로운 작품을 쓰면 거기에 최선을 다하고, 지난번에 썼던 작품에서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려고 한다.

-그럼 가장 최근작인 <양파가 운다>에서 아쉬웠던 점이라면. =초점이 너무 줌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읽는 사람들에게 그 안에서 다양한 걸 못 보여줬다고 해야 하나. 대리만족 면에서 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어떤 작품을 준비 중인가. =연애소설인데, 연애소설 같지 않은 연애소설이다. 약간 반전이 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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