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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름으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2001-02-23

남녀간의 사랑, 삶에서 딱 한번 확실하게 일어난다고도 하는 진짜 사랑의 느낌. 그 실체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보면야 본능의 실현과정에서 가끔 나타나는 일종의 부대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를 퍼뜨려 영속시키려는 본능 말이다.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 본능을 실현하는 수컷의 전략은 기회가 나면 언제 어디서나 암컷을 유혹하는 것이다. 되도록 널리 씨를 퍼뜨려야 우수한 암컷과 조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암컷은 우수한 수컷만 골라 받는 전략을 구사한다. 아무 수컷이나 덜컥 받아버리면 더 나은 선택을 할 기회가 당분간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왜, 그런 말 있잖은가. “어떤 사내가 열 계집을 마다하랴.” 수컷들은 성공적인 짝짓기를 위해서라면 천적의 먹잇감으로 찍힐 위험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데, 도처에서 정적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살아가는 빌 클린턴이나 제시 잭슨 목사 같은 정치·종교지도자들조차도 이런 판국이니 보통의 수컷들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한 ‘문명은 억압’임에 분명하다. 일부일처제를 근간으로 하는 ‘문명사회’에서는 한번 짝을 지은 자는 다른 암컷이나 수컷을 넘보아서는 안 된다. 간통죄니 혼인빙자간음죄니 하는 괴상한 처벌제도가 없는 사회에서도 부부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짝짓기에는 ‘불륜’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딱지와 유형·무형의 사회적 불이익이 따른다. ‘진짜 사랑의 느낌’으로 맺어지는 짝짓기도 이 규제의 그물에서 풀려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진짜 사랑의 느낌’이 언제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일어날지 모르고, 또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 것을 요구하는 가족제도와 규범이 사랑을 더이상 아름다울 것 없는 습관으로 만들기도 하고,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비난받아 마땅한 탈선행위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참 나쁜 놈이다.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려보고 싶은데, 간통죄니 불륜이니 하는 법률과 규범 때문에 뒤가 찜찜해서 그런다고 솔직하게 말할 일이지, 수컷의 본능이니 사랑의 느낌이니 그 무슨 되먹잖은 소린가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내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다. 할리우드영화의 선동에 놀아나서 그런 거다. 그 영화란 다름아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클린트 이스트우트가 권총이 아니라 니콘 카메라를 든 내셔널 지오그라픽의 사진기자 로버트로, 여배우는 예뻐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뒤집은 메릴 스트립이 미국 아이오와주 시골마을 농사꾼의 아내 프란체스카로 등장해서 딱 나흘 동안 사랑하고 영원히 헤어진, 그런 좀 고리타분한 영화다.

독일서 귀국한 직후인 98년 봄쯤일 게다. 어느 술자리에서 누가 물었다. 근자에 본 영화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게 있느냐고. 이 영화를 거론했더니 반응이 제 각각이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그런 영화가 다 있느냐고 눈으로 물어온 건 20대. 보진 않았지만 괜찮은 영화라는 말은 들었노라고 비위를 맞춘 건 30대. 나이 마흔을 오래 전에 넘긴 선배만이 그윽한 눈길을 보내왔다.

결혼은 사랑의 느낌을 습관화된 일상으로 전환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도 사랑의 이름으로 하루라도 빨리 거기로 들어가려고 안달을 하는, 그런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제안을 눈물로 거절한 프란체스카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면서 내 모든 걸 다 바치고 싶어. 하지만 난 알아. 내가 당신을 따라나서면 우리의 사랑도 지금과는 달라질 거라는 걸.”

부부가 아이를 키우면서 함께 공부하느라 독일 유학 첫 3년 동안 단 한번도 극장에 가지 못했다. 아내의 생일을 핑계로 아이를 이웃에 맡기고 처음으로 본 영화가 바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였다. 흥행에 실패한 탓으로 개봉 얼마 뒤 마인츠시에서 제일 큰 ‘프린체스 키노’에서 쫓겨난 이 영화를 나는 아내와 함께 시내 분수대 뒷골목 재개봉관 ‘키노 카피톨’에서 감상했다. 우리가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 관객이라고는 할머니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낭패였다. “아이쿠, 이런! 잘 모르는 동네에서는 사람이 많이 꼬이는 데를 가랬는데. 간만에 보는 영환데 완전히 잘못 짚었군.”

하지만 잘못된 것은 영화가 아니라 이런 선입견이었다. 잘났지만 많이 늙은 이스트우드와 예쁘진 않아도 매력있는 메릴 스트립은, ‘사랑의 느낌’이 결혼이라는 제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며, 그런 사랑은 아무리 짧은 것일지라도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과 최소한 같은 무게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사실 사랑은 짧은 것이라야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다. 처음에 하나뿐이던 관객은 둘로 늘어 있었다. 시신을 화장해서 로버트의 육신이 재로 뿌려진 로즈먼 다리에 흩뜨려달라고 유언하는 프란체스카, 두 할머니는 그런 모습으로 의자에 붙박혀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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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시민/ 시사평론가, MBC 100분토론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