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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비포 선라이즈’ <토끼와 리저드>
김용언 2009-10-21

synopsis 입양아 메이(성유리)는 과거를 찾기 위해 홀로 서울에 도착한다. 그녀는 공항 택시정류장에서 희귀한 심장병 민히제스틴 증후군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택시 기사 은설(장혁)을 만난다. 메이는 은설의 택시를 타고 입양 기록부에 적혀 있는 주소 성북동으로 찾아가지만, 자신의 친부모는 이미 그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고모에게 듣게 된다. 고모의 집을 나와 홀로 헤매던 메이는 우연히 은설과 재회하게 된다. 은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신변 정리를 시작하지만, 자꾸만 메이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두 남녀가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하룻밤 로맨스를 완성한다. 이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주연의 <비포 선라이즈>는 이같은 줄거리의 전형으로 굳어진 느낌이다.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페미스 출신의 주지홍 감독의 충무로 데뷔작이자 장혁과 성유리 주연의 <토끼와 리저드> 역시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되어 2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여자 메이의 눈을 통해 서울 성북동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다운타운의 예쁘장한 가게들, 한참 전에 문을 닫은 예서역(驛) 근방의 아름다운 복고풍 풍광이 차례로 보이면서, 한국의 이곳저곳은 어딘지 이국적인 오브제로 바뀐다. 메이에게는 ‘무례하고 거친 아저씨’쯤으로 비치는 은설의 캐릭터 역시, 메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일종의 ‘강요’를 통해 그녀의 깊숙한 속내를 꺼내놓게 하는 ‘친밀한 타인’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른다. 그렇게 최근 한국영화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던 풍경이 나온다. 카메라는 오로지 두 주인공에게만 집중하며, 그들의 표정과 몸짓과 대사만이 1시간40여분의 러닝타임을 촘촘하게 메운다.

영화가 끝난 뒤 기억에 남는 것은 색이 약간 바랜 톤의 독특한 화면 색감과, 김광진과 함께 ‘더 클래식’ 멤버였던 박용준 음악감독의 세련된 멜로디다. 기실 영화는 거기서 더이상 나아가질 않았다. 메이와 은설이 각자 간직한 아픔은, 침착하게 절제하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휘발되는 쪽에 가깝게 보인다. 입양의 상처, 도마뱀 모양 흉터의 기억,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꼼짝없이 기다리는 무기력감 등 감당하기 힘든 상처들을 짊어졌지만, 주인공들은 오열하고 폭발하는 대신 아픔을 감춰버리는 쪽을 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더 큰 아픔의 징조처럼 느껴지기보다는 아예 그 아픔 자체가 소통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듯한 답답증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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