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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맛있는 대한민국을 먹고 싶다
김중혁(작가) 2009-11-12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장 조리사를 중심으로 ‘대통령 경쟁력 강화 위원회’를

한동안 <Best Restaurant>이라는 외식전문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현재 <씨네21>에서 ‘그 요리’라는 멋진 칼럼을 연재중인 요리사 박찬일씨가 편집장이었고, 나는 요리의 ‘요’자도 모르지만 한국말을 비교적 정확하게 쓸 줄 안다는(게 어디냐며!), 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수석 기자가 되었다. 수석기자와 수습기자는 습자지 한장 차이였다. 나는 선배들이 추천해주는 음식 잡지와 각종 전문서적을 읽으며 (그래요, 저, 요리를 글로 배웠어요) 용어를 익혔고, 사전보다 두꺼운 와인 책을 읽으며 카베르네 소비뇽이니 메를로 같은 외계인의 언어나 다름없는 생소한 단어들을 처음 대했다.

추어탕집 전격해부, 정말 고역이더라

나에게 처음 배당된 기사는 ‘서울의 유명 추어탕집 전격 해부’라는 꼭지였는데 이름만 거창했지 실은 ‘네가 이 바닥에서 굴러먹으려면 처음부터 한번 된통 당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하하’라는 음험한 의도가 밑바닥에 찐득하게 깔려 있는 ‘사람 잡는’ 기획이었다. 일은, 간단하다면 간단했다. 추어탕을 먹고 맛과 분위기와 서비스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평가해서 기사로 작성하는 것이었다. 취재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몰래 맛을 음미하고 몰래 평가하고 몰래 사진 찍고 돈 내고 나왔다. 점심에 추어탕, 오후에 추어탕, 저녁에 추어탕(웩!), 하루 세끼 추어탕만 먹고 다녔다. 내 평생 먹어야 할 미꾸라지를 며칠 동안 다 먹었다. 문제는 맛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세끼를 추어탕만 먹고 다니다보니 3일쯤 되자 그 맛이 그 맛 같고, 이 맛이 저 맛과 다르지 않았다. 나름의 평가표를 작성하고 (매운맛 4, 구수한 맛 3 같은 식으로) 각 추어탕만의 특징과 식당만의 장단점을 기록하고자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평가는 무색해졌고 숫자는 의미가 없어졌다. 이전까지는 단 한번도 맛을 평가해본 적이 없었고 맛의 차이와 특징에 대해 고민해본 적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타고난 재능도 필요하겠지만 맛은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기억된다. 머리나 마음의 특정한 부분을 열어놓아야만 혀의 감각도 열리게 되는 것이다. 첫달의 추어탕 꼭지는 추어탕의 맛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사기에 가까운 날림기사가 되고 말았지만 그 이후 낙지 특집이나 냉면 특집을 할 때에는 제법 맛을 기억하고 한데 뭉치고 분류할 수 있게 됐다.

<Best Restaurant>의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것은 요리사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뚝딱뚝딱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접시에다 담아 내주었다. 하나의 요리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어 먹고 또 먹는 바람에 몸이 급속히 불어났다. 누군가 내 뒤에서 펌프로 바람을 주입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함께 다니던 박찬일 편집장과 나는 고등학교 유도부와 어두운 골목길에서 맞부딪친다 해도 액면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 몸매가 됐고, 하루 세끼는 기본, 야근을 핑계로 한끼를 추가하는 만행을 자주 저질렀다. 이 맛을 체험하고 나면 저 맛이 궁금했고, 새로운 식당이 궁금했고, 새로운 재료가 궁금했다. 한끼를 먹을 때마다 하나씩 배웠다. 나는 요리사들의 접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10개의 재료 중에서 어느 것을 맨 먼저 끌어올리고 어느 것을 나중에 둘 것인지, 어떤 재료가 어떤 재료를 감싸게 할 것인지, 요리사는 그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한다. 무게와 부피를 가늠한 다음 시기와 순서를 정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집에서 요리를 시작한 게 그즈음이었다. 무게와 부피를 가늠하고 시기와 순서를 정하는 걸 해보고 싶었다. 쉽지 않았다. 무엇인가 조금만 어긋나도 맛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게 재미있기도 했다. 한순간의 결정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처럼 한순간의 잘못이 음식 전체를 망친다.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1Q84>의 주인공 덴고는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을 때 요리를 한다고 했는데,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료를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칼로 썰고 다듬고 프라이팬에 익히고 뒤집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어딘가에서 어긋나 있던 마음의 뼈가 차분히 제자리로 들어가는 듯한 ‘접골원의 체험’을 하게 된다.

대통령에게도 요리를 가르쳐주자

장진 감독의 신작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음식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의 이야기라기보다 음식의 이야기다. 따로 떨어진 세개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꿰는 주인공은 청와대의 장 조리사다. 세명의 대통령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장 조리사를 찾아와 힘을 얻어간다. 이순재 대통령은 소주 한잔 하고 가고, 장동건 대통령은 라면 먹고 가고, 고두심 대통령은 멸치를 씹어 먹고 간다. 어쩌면 청와대의 식당은 단순히 밥을 먹는 곳이 아니라 비밀 정부기관인지도 모른다. 장 조리사는 주방에서 일하는 척하지만 실은 국가최고자문기구의 핵심 인물이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면면히 이어나가는 최고 권력자일지도 모른다. 정권이 바뀌어도 장 조리사는 바뀌지 않으니까.

세명의 대통령은 훌륭한 대통령들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고민하는 대통령들이다. 머리와 마음의 특정한 부분을 열어놓아야만 혀의 감각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대통령들이다. 귀를 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대통령들이다. 맛과 인생과 충고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은 키 크고 잘생긴 대통령이 아니라(기보다 아휴, 잘생기면 좋긴 하겠지만 그보다) 귀가 열린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장 조리사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국가위원회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 이름은 ‘대통령 경쟁력 강화 위원회’. 주 업무는 대통령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 하나의 요리를 만든다. 요리를 하면서, 재료를 썰고 다듬고, 끓이고 졸이고 볶으면서,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장 조리사 같은 사람에게 조언도 들어가면서 말이다. 맛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면 그 정도의 경쟁력은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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