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2기 작품 4편
김용언 2009-12-09

지난 3월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1기 작품들이 처음 선보였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독창성과 완성도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2기 작품 중 <로망은 없다> <나는 곤경에 처했다!> <너와 나의 21세기>는 이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눈 밝은 이들의 호평을 휩쓸었다. <너와 나의 21세기> <나는 곤경에 처했다!>는 내년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에서 상영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미공개작 <여자 없는 세상>과 함께 한국영화의 신선한 피를 맘껏 흡수하시길. 12월10일부터 CGV압구정과 부산 CGV서면에서 볼 수 있다.

<로망은 없다> 감독·각본 박재옥, 수경, 홍은지 프로듀서 김성철 목소리 출연 박지윤, 전진아, 정형준 제작연도 2009년 상영시간 70분 등급 전체 관람가

“사람은 어떻게든 결혼한다.” 애니메이션 <로망은 없다>는 언뜻 보기에 연필로 죽죽 그린 듯 소박한 그림체다. 하지만 4컷 만화를 연상시키는 ‘쉬워 보이는’ 외관으로 이 작품을 단번에 평가하면 안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가는 과정을 70분 안에 풀어넣은 이 애니메이션은 일상다반사의 풍경, 그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를 천편일률적이지 않게 풀어간다.

스물여섯살이 되도록 결혼에 관심이 없던 깍쟁이 처녀 고영숙과 선을 여러 번 보면서 사람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순박한 총각 황순복.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던 두 사람이 결혼에까지 쉽게 이르게 된 데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뭐 대단한 비밀은 없다. 단지 고영숙은 허풍선이 한량이었던 아버지에게 질렸고,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채 동생들 뒷바라지하는 것에 싫증이 나 있었고, 그리고 꾸물꾸물하고 속 터지는 일은 참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남자와 결혼하는 쪽을 택했다. 황순복은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 중 누구보다 예쁘고 똑 부러진 영숙에게 처음부터 반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전에 잠시 깊게 사귀었던 연인 미자와 어이없는 계기로 헤어졌기 때문에 영숙과 결혼한다. 무협소설 <구문일협>과 모험 미스터리 <암굴왕> 사이의 간극은 클지언정 두 작품 다 멋진 주인공이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너무나도 다른 남녀가, 남들은 아무도 인정하지 못하는 어떤 특정한 부분 때문에 서로를 선택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과정이, 재치있는 자막과 (두 사람의 자식들이 넣는) 유머러스한 추임새와 함께 펼쳐진다. 귀엽고 재미있고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곤경에 처했다!> 감독·각본 소상민 프로듀서 송혁조 촬영 오태석 출연 민성욱, 정지연, 이승준, 김주령 제작연도 2009년 상영시간 98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로망은 없다> 외에 이번에 소개되는 장편 실사영화 세편은 모두 똑같이 청춘을 이야기한다. 단점 많고 미화되지 않은 청춘의 그림자. 그중에서도 <나는 곤경에 처했다!>는 칭얼거리는 소년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찌질남의 초상을 무척 인상깊게 그린다. 주인공 선우는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지만 생활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바른생활소녀’ 연인 유나에게도 늘 실망만 안겨준다. 그는 “중요한 결정은 늘 술에 취한 채 내렸기 때문에, 술에 안 취했을 땐 늘 우울하고 희망이 없”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보인 술주정 중에 가장 리얼한 ‘꾼’으로 기억될 선우(자주 비교되는 홍상수 감독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선우는 그야말로 ‘20대’의 진상질을 날것으로 까발린다. 보는 사람마저 옛 기억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의 파란만장 연애담은 갈수록 꼬여만 간다. 결국 <나는 곤경에 처했다!>는 스스로의 삶에 확신을 가질 수 없고, 하지만 꼭 뭔가 확실한 목표를 세워야 하는지조차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청춘들의 삶을 미워하지 않고 경멸하지 않은 채 쓰다듬는다. “그래 너도 직장인이지? 씨발 정규직이지? 지구는 너희 같은 직장인만 지키는 게 아니야”라는 고성방가마저도 유머와 애정을 품은 채, 쉬운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라는 명제를 슬쩍 꺼내 보인다.

“딱 한번만 오빠 얼굴을 때리고 나면 용서할 수 있을 거 같아”라는 전 여자친구 말에 호기롭게 얼굴을 내밀었다가 막상 그녀가 “어금니 꽉 깨물어라” 하며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움츠리고 마는 남자의 찌질함, 적어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난 왜 이럴까”라는 뻔한 자괴감으로 울부짖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영화의 미덕이다. 여자 때문에 자꾸 무릎 꿇어야 하는 주인공은 괴롭지만, 보는 이는 즐겁다. 사실 뭐 주인공도 즐거웠을 것이다.

<너와 나의 21세기> 감독·각본 류형기 프로듀서 편경우 촬영 김현옥 출연 한수연, 이환, 신현호 제작연도 2009년 상영시간 83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비단 이것이 88만원 세대만의 이야기일까. <너와 나의 21세기>는 영문 제목처럼 ‘판타스틱한 21세기’, 신자본주의의 세기, 더불어 얼마 전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루저’ 발언을 떠올리게 만드는 외모 지상주의의 세기에 영문도 모른 채 빠져버린,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조자 알아차릴 수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영화다.

수영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만 44사이즈, 45kg 이하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디자인 회사에 취직할 수도 없다. 남자친구 상일은 홍대쪽에서 모자 가판대를 운영하지만 장사가 잘 안된다. 두 사람은 자주 임상실험센터에서 피를 뽑는다. 그러고 나면 얼마간의 돈이 쥐어지고, 두 사람은 그 돈으로 맛있는 걸 사먹는다. 팔에 무수한 주삿바늘 구멍이 나 있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괴롭거나 슬프진 않다. 그러다 전신성형수술을 위한 돈이 정말 다급해진 수영은 결국 일하던 마트에서 바코드를 조작하여 물건을 빼돌리기 시작한다. 수영에게 호감을 보이는 또 다른 남자 재범은, 대학 졸업 뒤 학자금 대출 때문에 카드깡 사채업 일을 하고 있다. 돈이 필요해, 라고 주인공들은 입버릇처럼 중얼거린다. 당장 굶어죽을 만큼 절실하지 않지만 또한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 혹은 미래’만을 쳐다보기 때문에 절실하다고 주장하며 동동거린다. 그들은 연민이나 도덕적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을 서슴없이 택하기를 되풀이한다. “기운내, 내가 있잖아”라는 공허한 약속은 더이상 어떤 위로도 보장도 되어주지 못한다. 돈이 이들의 현재를 유지시켜준다. 그렇다면 ‘밝은 미래’까지 유지시켜줄까. 설교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애써 분칠하지 않은 20대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감독의 결기가 새파랗다.

<여자 없는 세상> 감독·각본 송재윤 프로듀서 최자영 촬영 백승범 출연 강원재, 김민수, 이훈국, 유환웅 제작연도 2009년 상영시간 90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오 놀라워라! 이만큼 남자들끼리의 세계를 가식떨지 않고 허풍떨지 않은 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니. 그것도 최근 영화에서 쉽게 보아왔던 하층민, 혹은 재벌가 청춘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기 때문에 더 묘사하기 어려운, ‘중산층’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20대 남자들의 (여자 앞에선 절대 털어놓지 않을) 치부가 리얼리티쇼처럼 드러난다.

<여자 없는 세상>의 네 친구 창현과 한철, 준과 승민은 허세와 치기 빼면 시체다. 이들은 딱히 모자랄 것이 없다. 부모 돈이 많아서 자기 이름으로 집을 세채나 보유하고 있고, 친구와 함께 나름 단골손님 많은 술집을 운영하고, 한때 방송 출연도 할 정도로 잘생겼고, 뭐 기타 등등의 이유로 즐길 만한 삶이다. 하지만 뭔가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난 부족한 게 있는 것 같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이들을 ‘희미하게’ 짓누른다. 그러다가도 대충 술먹고 깽판을 치며 여자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으로 청춘 말기, 스물아홉의 밤시간을 흘려보낸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라는 진부한 말이나 지껄이는 그들에게, 과연 여자는 많다. 북창동 룸바에 가면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벌거벗은 여자들이 있고, 노래방에서 같이 춤추고 노래 불러주는 도우미들도 있고, 그들의 마음을 오랜만에 설레게 만드는 여자들도 등장한다. 그러나 ‘사회화’되지 못한 그들의 미숙함 때문에, 혹은 그들만큼이나 허세와 허영을 좇으며 살기 때문에 여자들은 그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초의 미학’을 주장하며 상처받지 않으려 하다가 결국 여자 때문에, 감정의 치명적인 함정 앞에서, 여자로 대표되는 타인들 앞에서 허약한 면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마는 수컷들의 씁쓸한 좌충우돌기가 흥미진진하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