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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이 이데올로기,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없다>가 이성호의 분노에 동의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용서는 없다>는 기시감이 많이 드는 영화이다. 강병진은 “<그놈 목소리>의 아버지가 <추격자>의 살인마를 만나 <세븐데이즈>의 과정을 겪은 뒤, 결국 <올드보이>의 아버지와 비슷한 파국을 맞는다”로 요약하였다. 그러나 <용서는 없다>가 진정으로 빚진 영화는 <아랑>이다. 십수년 전 집단성폭행 사건이 있었고, 가해자들이 고위층 자제인 까닭에 법적 처벌을 면했으며, 피해자가 죽은 뒤 원한을 품은 주변 남성이 수사과정을 역이용하여 복수해간다는 설정도 비슷하지만, 진짜 유사점은 따로 있다. <아랑>의 마지막, 여형사 민소영(<용서는 없다>의 여형사는 민서영)은 절규한다. “자기 새끼가 똑같은 꼴을 당하는 것을 보고 죽어야….” 참 이상하지 않은가? 성폭행 피해 경험 때문에 성폭행범에 대한 분노가 남다른 여형사의 응징적 발언이 ‘당신 딸도 똑같이 당하는 꼴을 봐야 한다’라니? 그녀가 이입하는 고통은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고통인가, 집안 여자가 능욕당하는 꼴을 봐야 하는 남성의 고통인가?

<용서는 없다>는 마지막 반전을 향해 치달리며, 많은 디테일들을 ‘용서’(excuse)하라고 요구하는 영화이다. 가령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한 딸을 납치해 며칠 늦는다는 전화를 걸게 하는 동안, 아버지는 왜 마중을 나가지 않고 있었나? 하는 의문부터, 마지막 시퀀스 군산의 이성호 집에서 강민호에게 두들겨맞은 지체장애인 이성호가 (다급한 강민호가 급히 차를 몰다가 막히자 뛰어서 도착한) 금강하구의 옛집에 어떻게 불과 몇분 차이로 홀연히 나타나 용서의 불가능성을 언급하고 함께 죽어주는 걸까? 등의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예의다. 그러나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의문이 남는다. 첫째, 이성호는 왜 굳이 강민호에게 그와 같은 방식(“나도 이런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공범의 대사)의 복수를 하는가? 둘째, 어떻게 최고의 부검의도 속을 만큼 두 사람의 시체 토막의 절단면이 완벽히 일치하는가? 두 질문은 영화의 주제와 이데올로기를 함축하는 것이기에 고찰을 요한다.

누나의 고통보다 정조가 더 중요하다?

이성호는 누나가 집단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뒤 벌어진 재판에서 화간으로 결론나자, 위증인 오은아와 부검의에게 특별한 복수를 계획한다. 이에 앞서 성폭행 가해자들은 사고사로 위장하여 조용히 죽였으며, 고위층 부모들에 대한 응징은 언급되지 않는다. 왜 범죄당사자들보다 위증인들에 대한 보복이 이토록 화려한가? 오은아는 토막이 쳐져 전시되었으며, 부검의에게는 딸의 몸을 헤집고 정액을 묻히는 영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성호의 분노는 성폭행이나 누나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벌어진 재판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즉 누나가 성행위를 즐긴 것으로 인정됨으로써, 누나는 ‘창녀’가 되었고(“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아버지의 반복되는 대사), “이 사람 저 사람 창녀라고 손가락질”하게 됐으며, 마침내 “증오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즉 죽은 누나를 ‘두번 죽이는 행위’로 ‘창녀 만들기’ 혹은 ‘시간’(屍姦)이 일어났으며, 누나를 직접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보다 ‘창녀’로 만들고 ‘시간’을 저지른 오은아와 부검의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호의 분노는 누나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누나의 정조와 명예에 관한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집안 여자의 정조와 명예가 더럽혀진 남성의 고통이다. 내 누나의 음부를 헤집고 ‘질부는 깨끗’하다던 강민호에게 네 딸의 질에 정액을 묻혀가며 상징적 의미의 ‘시간’을 하라는 것이 이 복수극의 요체이다. 이를 통해 보상받고 싶은 건 살아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누나)의 고통이 아니라, 죽어 불명예가 된 집안 여성을 둔 남성(나)의 굴욕감이다.

가장 많이 유사성이 언급되는 <세븐데이즈>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모정을 볼모로 변호사에게 범인을 빼오라 명한 어머니는 범인에게 딸이 당한 신체적 고통을 안겨주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딸은 ‘그런 여자’임이 까발려졌지만, 어머니에겐 명예보다 복수가 더 중요했다. 이를 통해 우연히 배후의 남성권력자를 추락시켰고, 변호사의 애먼 딸은 애초 죽일 마음조차 없었다. 반면 부정(父情)에 호소하는 이성호는 누나가 ‘그런 여자’가 된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누나의 고통이 아닌 자신의 굴욕감을 보상받으려 복수를 하면서도, 정작 배후의 남성권력자에겐 복수의 염(念)을 품지 못하며, ‘헤픈 여자’ 오은아와 부검의의 애먼 딸은 초장에 죽여버린다.

성폭행에 분노하면서도 초점이 여성의 고통이 아니라 남성의 굴욕이며, 거대한 남성권력에는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시금 ‘헤픈 여자’나 ‘너의 여자’를 유린함으로써 분노를 해소하는 남성중심의 논리는 꽤 유구한 것이다. 가령 ‘윤금이 사건’에 대한 분노는 살아서도 한·미 여러 남성들에게 능욕을 당했을 ‘양공주’의 고통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누이’가 능욕당한 한국 남성의 굴욕감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양X들에게 태극기를 꽂자’는 외설적 언사들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호텔 르완다>나 <요코 이야기> 등에 등장하는 민족간 보복성 성폭행이나 여성혐오 범죄가 나올 때마다 ‘네 딸도, 네 마누라도…’ 등의 발언이 끊이지 않는 것, 남편 앞에서의 성폭행에 이례적인 중형이 언도되는 것 등은 모두 비슷한 맥락이다. 만약 이성호의 누나가 살아서 재판을 하여 ‘그런 여자’로 판결났으면 어찌되었을까? 누나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위증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면 어찌되었을까? 누나를 ‘명예’살인하지 않았을까?

‘그런 여성’과 ‘아닌 여성’의 이분법

오은아와 부검의의 딸은 어떻게 키, 몸무게 등 체형은 물론이고 여섯 군데의 절단면이 정확히 일치할 만큼 피부의 착색 정도, 척추뼈의 굵기, 근육의 발달 정도, 피정맥(皮整脈)의 주행 등이 똑같을까? 둘은 비슷한 몸을 찾아 수집된 게 아니며, 유전적 연관성도 없고, 나이차도 꽤 난다. 공통점은 20대 여성이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은 20대이기만 하면, 공장에서 찍어나온 마네킹처럼 사지가 호환 가능할 정도로 균질하단 말인가?

영화의 첫 부검장면은 강민호와 관객에게 게임을 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 난자된 젊은 여자의 나신이 누워 있다. 곧바로 읊어진다. “오은아, 29살, 유흥업소 종사자로….” 여기서 강민호와 관객의 긴장감과 불편함은 다소 완화된다. 어때? 유흥업소 종사자의 몸이라니까 좀 편한가? 이성호 혹은 감독이 묻는다. 여기에 강민호가 걸려든다. “선홍빛 유두와 움푹 팬 배꼽 적당한 체모가 나 있는….” 그러자 반전을 통해 보란 듯이 다시 묻는다. 네가 성적으로 모욕한 그 몸이 네 딸의 몸이었다면? 일견 역지사지의 철학을 담은 듯한 이 질문은 사실 개똥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는 ‘그런 여성’과 ‘아닌 여성’을 이분하고, ‘그런 여성’이면 어떻게 죽여도 괜찮지만, ‘아닌 여성’이 ‘그런 여성’과 같이 취급받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여성의 몸은 성적 대상물이자 복수의 재료이며, 그나마 뒤섞어놓았을 때 전혀 식별도 되지 않는 물질로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사물, 그것도 어떠한 고유성이나 개별성도 갖지 못한 획일적인 사물이다. 여성은 개피가 필요해서 찌른 몰티즈나 사진이 필요해서 총질을 해댄 철새 이상이 아니다. 이처럼 여성을 정조로 이분하고 여성의 몸을 무차별적인 질료로 환원하며 금강이라는 자연물에 빗대며 숭배하는 듯한 태도는 남성중심주의의 알파와 오메가인데, 정작 영화가 애석해하며 파고드는 대목은 따로 있다. 여성의 몸은 다 똑같기 때문에 ‘그런 여자’와 ‘아닌 여자’라는 중차대한 구분이 몸뚱이만으로 전혀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오은아라는 ‘그런 여자’이든, 내 누나 혹은 네 딸이라는 ‘아닌 여자’이든. 그러니 슬프지, 놀랍지, 당했지, 억울하지? 라고 뇌까리는 이성호 혹은 감독에게 해줄 말은 한 가지다. 부디 반전 좋아하고 개똥철학 좋아하는 <쏘우>의 감독님과 만나 ‘솔 메이트’가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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