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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분열증

<의형제>를 지지하기 망설여지는 이유는

<의형제>를 보고 나서 할 수 있는 가장 호의적인 평은 (내 생각에) 송효정이 썼다(<씨네21> 제741호). 다른 비평이나 관객의 반응을 보아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요약하자면 이 영화에는 분단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기존의 한국영화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말해졌으므로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누구나 지적할 수 있는 비판의 지점들, 이를테면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고 문제를 낭만적으로 개인화했다거나 이주민들의 현실을 강동원과 송강호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도구화했다는 의심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이 지적의 내용을 거꾸로 뒤집은 게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의 근거가 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위의 불편함에 대해 더 말하는 것이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두 견해는 양극의 해석처럼 보이지만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거기에는 동일한 환상의 막이 작용한다. <의형제>의 환상,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의 환상.

아이는 왜 스스로 눈을 가리나

영화를 본 뒤 몇몇 장면이 풀리지 않은 채 맴돌았다. 서사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들, 심지어 서사의 완성도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 지점이 있다. 두 번째 볼 때서야 이들의 연결고리를 찾았고 그걸 말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의형제>를 어쨌든 고운 심성의 영화로 보는 것 같은데, 위의 장면들은 이 영화가 좀 이상한 자기부정, 혹은 자기분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은밀히 보여준다. ‘시달리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자기부정(분열)이 영화의 의도적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제 언급하게 될 세 장면도 감독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기보다는 장르적 긴장감, 혹은 상업적 고려에 의한 첨가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강동원을 보거나, 송강호를 보는 게 아니라 <의형제>를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그걸 말해야만 한다.

우선 영화의 도입부, 그림자는 남한에 정착한 김정학의 아내와 장모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송지원(강동원)은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지만 말리지 못한다.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그림자는 “남조선의 낭만적인 놈들은 다 병신”이라고 내뱉는다. 일단 이 말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그러고나서 김정학이 어린 아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잔인하게 구타당한다. 그 옆에는 아이의 엄마와 할머니가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다. 그때 송지원이 아이의 눈을 가린다. 이상한 건 모든 사건이 벌어진 뒤 복도에서 안기부 요원들과 송지원, 그림자의 총격전이 벌어질 때에도 아이는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고, 영화가 그걸 의식적으로 몇번 더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미 엄마와 할머니의 시체를 보았을 것이고,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본 것과 다름없는 그때에, 즉 눈을 감기에는 이미 늦은 그 시점에 눈을 가리게 만드는 것. 눈을 가린 아이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 이미 본 사실을 못 본 듯이 처리하는 제스처. 무엇을 위해서일까. 영화는 무엇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것일까. 혹은 영화는 무엇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는가. 나는 이 장면이 이후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영화의 선언, 관객의 관람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탈북한 남자와 남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2세, 영화 속에서 남과 북의 화합 혹은 화해의 상징일 이 아이는 그러나 그 결합의 결과로 처참한 죽음들, 그 화해의 불가능성을 목격했다. 남한에서 홀로 살아남은, 아니 버려진 아이의 미래는 아마도 비극일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무언가를 보지 않아야만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가.

두 번째 장면은 그림자가 최후를 맞이하며 송지원과 이한규를 향해 마지막으로 “감상적인 새끼들”이라고 말할 때다. 비슷한 말을 우리는 이미 위의 시퀀스에서 들었다. 한치의 감정도 없는 살인마 그림자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덧붙여진 대사겠지만, 영화 후반부의 이 대사는 도입부에서 눈을 가리고 있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의 행동의 의미가 영화 밖과 안 모두를 지시하듯이, 그림자의 “감상적인 새끼들”이라는 말 역시 영화 안과 밖으로 돌아오거나 투사된다. 반복하지만, 본 걸 못 봤다고 하는 제스처, 환상 안에 있으려는 몸부림, 어쩌면 불가능한 걸 가능하다고 믿는 것, 결국 감상에 매몰되는 것. 이한규와 송지원의 인간적인 관계가 이념을 초월할 수 있다고 열심히 보여주기 직전에 ‘앞으로 볼 건 환상이야’(아이의 장면)라고 선언하고, 직후에 ‘그렇게 믿다니 감상적인 것들’(그림자의 장면)이라고 말하는 두 장면을 넣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의 자기부정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화의 의도라고 보기는 어렵고, 서사적 결함이라고 말할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그걸 판단하는 게 이 글의 결론이 될 텐데, 그전에 마지막으로 한 지점을 더 이야기하려 한다.

분열, 불안, 죄의식의 징후

에필로그의 봉합에 대해 사람들은 이 영화의 현실감을 떨어뜨린다고 불평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장면은 현실감을 망치는 갑작스러운 판타지적 해결이 아니라 그 자리에 올 수밖에 없는 판타지다. 영화 안에서 그 이유를 찾을 필요를 느낀다. 일단 나는 이 영화의 진짜 엔딩은 그림자가 죽고 송지원이 병원으로 실려가는 순간이라고 본다. 그때 송지원의 상상 속에 아내와 아이의 평화로운 모습이 나타나는데, 대개의 영화에서 이런 경우는 주인공이 결코 되찾을 수 없는 순간이며 죽음을 암시한다. 송지원은 죽을 것이고 이한규는 표창은커녕 처벌을 받고 죄책감을 안은 채 더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살 확률이 크다. 이 부서진 현실의 엔딩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화도 부서질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 해체가 아닌 가치의 복구를 추구하는 영화의 서사는 그걸 견딜 마음이 없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마지막 판타지가 두 시간 가까이 밀고 나간 영화의 성취를 갉아먹는 영화적 실수가 아니라, 바로 그 성취(영화의 성취이기도 하고, 송강호-강동원의 성취이기도 하며, 남한 안기부 요원-북한 간첩의 성취이기도 한데, 그건 결국 모든 게 탈색되고도 남는 ‘인간’의 전면화)를 지키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영화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송지원이 옥상에서 떨어진 뒤,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다”고 절실하게 말할 때, 아무도 배신하지 않은 중립적인 사내, 그 어떤 이념색도 없는 ‘인간’으로 남고자 할 때, 그리고 영화가 틈틈이 그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해왔으므로 그의 선의에 우리가 설득될 때, 여기에는 그를 간첩이 아닌 인간으로 보자는 영화와 우리의 요구가 개입된다. 남북정상회담과 북한 핵실험 사이에 존재하는 송지원은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환상의 대상이다. 악의 축으로 믿었으나 알고 보니 힘없고 칭얼대는 타자, 끌어안을 수도 밀쳐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이 시대 남한 사람들의 분열, 불안, 죄의식의 징후 말이다. 그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피상적으로 그는 송지원과 달라 보이지만, 영화는 느닷없이 그의 행동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북한의 실체, 혹은 이데올로기의 실체란 없고, 결국 이런 식으로밖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의 선택이 분명 과거의 영화들보다는 세련된 것일지라도 한편으로는 뭔가 피하는 느낌이 있다. 송지원의 인간성과 그림자의 괴물성이 오직 개인적 수준에서 강조될수록 나는 영화가 애써 어떤 불안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두 남자는 점점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에 가까워진다. 그들은 북한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지금 우리의 분열증의 형상화다. 북한은 여전히 외부에 있다.

희망사항이 현실을 대체할 순 없다

결국 <의형제>의 이런 자기분열(부정)은 영화의 ‘무의식의 무의식적’ 표출인 것 같다. 두 남자의 이념을 초월한 우정의 메인 서사, 즉 이 영화의 지향이 있고, 영화가 위치한 토대, 즉 지금 남한사회의 실재가 있다.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틈의 현상이 바로 영화에서 불현듯 돌출되는 위의 세 지점이며 그건 영화가 억압하거나 모른 체하는 무의식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기분열이 영화적 지향(판타지)으로 현실(real)을 끌어안은 결과물이 아니라, 지향으로 현실을 지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지점으로, 일종의 자기기만처럼 느껴질 때다. <의형제>를 지지하기 망설여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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