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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show] 당신의 판타지를 ‘가짜로’ 실현시켜 드립니다
심은하 2010-04-02

미술감독 류성희가 만난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녀. 손에는 막대걸레가 들려 있다. 그녀의 꿈은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것. 다음 컷에서 그녀는 두툼한 방한복 차림으로 손에는 작살을 든 채 남극 한가운데에 도착한다. 평범한 이들의 판타지를 사진으로 구현한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의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 중 두컷이다. 꿈(<내사랑 지니>)이나 기억(<수공기억>), 시각적 체험(<씨네매지션>)에 관한 집요한 탐구를 이어온 정연두의 관심은 그 모든 것과 현실 사이의 경계, 그리고 매체를 넘나드는 유희정신에 있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최연소 ‘올해의 작가’이자 백남준에 이어 국내 작가로는 두 번째로 뉴욕현대미술관에 입성한 당대 가장 뜨거운 아티스트 정연두. 그의 작업실을 현재 한국 영화미술계에서 첫손에 꼽히는 프로덕션디자이너 류성희가 찾았다. 오롯이 판타지를 위해 복무하는 영화 미술감독으로서 그녀가 흥미를 느낀 부분 또한 정연두가 펼치는 경계의 유희. 그리하여 질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류성희: 정연두 작가님에 관한 기사를 보면 흔히 ‘꿈과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작가’라고들 하는데, 사실 꿈이나 판타지 같은 단어는 좀 쑥스러울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럼에도 그런 작업들을 꾸준히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영상쪽 일을 하실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 마술사 이은결씨가 공연하는 모습을 촬영해서 그 과정을 동시에 상영하는 <씨네매지션> 작업을 내놓으셨더라고요. 영화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처럼 각기 다른 매체들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가 특히 궁금했어요.

정연두: 제가 처음 영상을 사용한 작품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였죠. 2007년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올해의 작가’라는 과분한 타이틀을 받고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채 10년도 활동하지 않은 작가에게 무려 1320㎡(400평)나 되는 전시공간을 준 거예요. 1320㎡면 굉장히 넓거든요. 여기 걸려 있는 큰 사진(대략 가로 1.5m, 세로 2m)이 80여점 이상 들어가야 해요. 주변의 큐레이터 분들에게 자문을 구하니 다들 한결같이 “완성도있는 전시를 하세요”라고만 하고. (웃음) 완성도있는 전시란 건 기존의 작품들을 밀도있게 꾸미라는 이야기라서, 일단은 제가 2000년부터 만든 작품을 다 모아서 전시안을 만들었죠. 그러고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님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괜찮다는 평가가 떨어지자마자 “잠깐만요, 2안이 있는데요”라며 슬쩍 내놓은 게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시안이었어요. 전시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쪽에 영화세트장을 짓고 거기서 촬영한 영상을 상영한다는 아이디어였죠. 당연히 거부당할 줄 알았는데 괜찮다며 해보자고 하셔서 20일 만에 세트 짓고 전시하게 된 거예요. 사실 그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는 1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거든요. 보통 영화에서는 세트, 조명, 사운드를 세팅해놓고 배우 감정까지 잡은 다음 완벽하게 가꿔진 모습을 찍고 편집해서 관객에게 보여주잖아요. 제작현장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나 흥분이 완성된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게 만드는 사람의 입장을 즐기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류성희: 총 몇개의 세트가 등장하나요?

정연두: 방-도시-거리-농촌-숲-산의 모두 여섯개 신이 나와요. 카메라는 레코딩 상태로 가만히 있고 세트가 바뀌는 거죠. 쉽게 말씀드려서 영화에서는 정면 숏을 찍은 다음 카메라를 끄고 측면 숏을 찍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정면 숏을 찍고 있다가 “측면!”이라고 지시하면 스탭들이 무대를 측면으로 돌리죠. 85분짜리 롱테이크 무성영화라 저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경험이었는데 촬영감독님께서는 어이가 없으셨던지 술자리에서 그러시더군요. “정 작가, 영화의 꽃이 뭔지 아나? 베드신이랑 롱테이크야. (웃음) 무수한 영화의 대가들이 15분짜리 롱테이크를 찍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는데 정 작가는 어떻게 영상작업을 처음 하면서 85분 롱테이크를 찍으려고 하냐”고요. 저는 그냥 “안 해봤으니 해보죠”라고 우겼죠. (웃음) 그 영상을 뉴욕에서도 상영했었는데 관객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스펙터클한 편집 화면에 익숙해서 그렇지 않은 것에는 쉽사리 지루함을 느끼는데 지루함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묘하게 빨려들어가는 게 아닌가라는. (웃음) 요즘은 3D까지 나오면서 관객을 압도하려고 드는데, 사실 이건 세트가 허술해지니까 점차 디테일들을 꼼꼼하게 뜯어보기 시작하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프로세스를 거치게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초창기 버스터 키튼 영화들에서 카메라가 멈추지 않고 본인이 직접 액션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영상작업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던 건데, 한번 해보고 나니 이후에도 맛을 들이게 된 거죠.

영화가 없다면 내 작업은 의미가 없겠죠

류성희: 감정을 생산하는 방식에 있어서 버스터 키튼이 동시대의 찰리 채플린과 비교되는 부분이, 편집이나 연기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 긴 테이크 안에서 몸으로 모든 걸 해낸다는 거잖아요. <수공기억> 같은 타이틀이나 방금 말씀하신 걸 들어보면 버스터 키튼처럼 실제로 몸을 써서 육체적인 작업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쪽인가요?

정연두: 이를테면 미술감독님께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들을 작품으로 완성하시는 거잖아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살짝 비쳐지는 것으로 생명을 다하죠. 저는 그 소품들이 영화의 한 장면에 잠깐 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지는 가치가 크다고 생각해요. 단지 촬영을 위해 세팅하는 건 핵심적인 매체를 정말 단순화시키는 거니까요. 그에 반해서 소품을 만든다든지 조명을 설치하는 작업들은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라 실재감이 매우 크고요. 제가 다루고 싶은 건 그런 리얼리티예요. 영화에서 두 남녀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이 고조된다고 할 때, 관객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명기사와 음향기사를 상상하진 않잖아요.

류성희: 그런 관심이 자연스럽게 마술사가 등장하는 <씨네매지션> 작업으로 이어진 건가요?

정연두: <씨네매지션>은 좀 달라요. 마술의 트릭을 보여주고서 다시 똑같은 마술을 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신기해한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기존의 완벽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만큼 트릭을 보여주는 것이 신기할 수도 있죠. 또 하나는 영화 용어 중에 ‘불신의 자발적 유예’라는 말이 있잖아요. 다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생각을 접어두고 극장에 가는 거요. 요즘 관객은 그 훈련이 너무 잘되어 있어요. 가짜를 보여주고 나서도 다시 조명과 소품에 의해 포장되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곧바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아요. 특히 이 작업에 영감을 준 조르주 멜리에스의 후반 작품들을 보면 영화의 특수효과나 소품들이 손에서 빚어진 듯한 인간적인 느낌을 줘요. 사실 저는 <해리 포터> 소설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모든 마법 주문을 다 외울 정도로. (웃음)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와서 보러 갔더니 감동이 별로 안 남는 거예요. 물론 미술이나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된 마법들은 완벽하죠.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진보나 테크놀로지가 과연 해리가 이모 집 다락방 구석에서 열망하던 마법의 느낌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을까 싶은 거예요. 차라리 저는 제가 좋아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의 MGM 영화들과 텔레비전 인형극장에서 막대기가 보이는 구름이나 선풍기로 만드는 바람이 감정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물론 최신 테크놀로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표현력이 확장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하지만 저는 테크놀로지를 잘 쓰는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입장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친근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제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를 찍을 때 HD영상을 하드 드라이브로 녹화하고 그 기록을 그대로 상영한 것도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에 가까웠거든요. 하지만 화면상으로는 허술한 세트에 사람들이 와서 움직이는 모습들이 인간적으로 와닿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기술의 관점이에요.

류성희: 말씀하셨던 부분이 영화 미술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는데, 이를테면 관객이 <마더>를 보러 갈 때와 <올드보이>와 <괴물>을 보러 갈 때의 기대감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판타지라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진짜처럼 보이고자 하는 목표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죠. 사실 <마더>에서 보여준 미술들도 진짜 리얼리티인가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인물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리얼리티를 과장하는 방식을 써요. 요즘 시골 가보면 텍스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지저분하고 그로테스크하지 않거든요. 한편으로 <올드보이> 같은 영화는 같은 스릴러라고 해도 그 영화의 여러 굴곡을 통해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미술이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우리는 진짜처럼 보이는 판타지를 위해 나머지 군더더기들을 다 없애죠. 정 작가님은 그것을 만드는 총체적인 과정이나 경험의 중요성에 주목하시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로운 것 같아요. 정연두: 사실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제 작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겠죠. 어떻게 보면 메타 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관객이 제 작품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돌아가게 되느냐인 것 같아요.

류성희: 제가 정 작가님을 만나뵙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 지점이에요. 작업을 하시는 목표랄까요. 그게 결국은 ‘관객의 체험’인가요? 정연두: 그건 정말 표현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예전에 어떤 신문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 분들은 좀 과장해서 기사를 쓰시잖아요. 제가 넘어졌다고 하면 부러졌다고 하고. (웃음) 제 작품의 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포레스트 검프>를 언급했거든요. 검프는 여자친구가 떠나간 뒤에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하고, 달리다 보니 동부에서 서부 끝까지도 뛰는데 주위에서는 ‘뭔가 심오한 메시지를 주려나 보다’면서 추종자들까지 생기잖아요. 대개 예술가들이 무언가를 하는 것은 포레스트 검프처럼 되게 단순한 자기 안의 원동력을 모티브로 삼는데, 하는 짓이 원체 바보 같으니까 주위 사람들이 의미를 붙여주고, 그 과정에서 전설이 형성되는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신문을 보니 ‘포레스트 검프 작가 정연두’라고. (웃음)

나는 감독 의자에 앉은 미술감독

류성희: 그럼에도 저는 관객으로서의 개인적인 감상이긴 하지만, 예전부터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따뜻하다’는 일관된 퍼스낼리티를 느껴요. 가끔 현대미술관 같은 데 가서 접하는 차갑고 냉소적인 미술의 느낌이 아니라 순진과 순수가 느껴질 정도로 솔직한 태도랄까요. 특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였는데요. 아이들이 꿈을 담아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실현시켜주는. 저도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영화에서 비슷한 작업을 했었거든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받는데, 거기에 그림을 그리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대목이 있어요. 그 장면을 위해 실제로 애들을 데려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걸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거쳤는데 아무리 공포영화라고 해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관객을 너무 놀라게 하면 안되잖아요. 작가님께서는 진짜 핑크, 빨강 같은 원색을 써서 애들이 그린 그림의 느낌 그대로 구현하셨지만, 저희는 필터링을 거쳐서 <해리 포터>처럼 ‘안심할 수 있을 만한’ 이미지들을 만들었죠. 저 또한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지만 영화다 보니 자제해야 하는데,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를 보면서 너무 부러운 거예요. 유치원생들에게 몇백, 몇천점의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그중에서 고르고, 재미있게도 고등학생들을 캐스팅해서 그 그림에 나와 있는 이미지대로 분장하게 했잖아요. 모티브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왜 고등학생을 캐스팅했는지도 궁금해요.

정연두: 영화와 제 작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 작업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혼자니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도 안 말린다는…. (웃음) 어떻게 보면 미술감독이 감독 자리에 앉아서 다 시키는 것과 같죠.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극도로 사실성이 부족한 아이들의 그림을, 사실성이 강한 사진이라는 매체로 옮긴다는 데 있었어요. 패션디자이너 분들과 애들 그림을 보면서 “얘가 이쪽 소매는 좁게 그리고 다른 쪽 소매는 커다랗게 그렸는데 그대로 의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의견을 내죠. “상당히 아방가르딕하게 나오겠는데요”라는 답이 돌아오고. 그런 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림을 카메라로 얼마나 표현할 수 있을지, 마치 게임을 하듯 디자인으로 풀어가다 보면 제가 채울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고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회라는 관점에서도 어떤 요소를 넣고 빼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고요.

<내사랑 지니>

그리고 고등학생을 캐스팅한 것은, 애들 그림 중에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 장면 때문이었어요. 아이가 운전하는 장면을 담는 것은 사실성이 굉장히 떨어지기 때문에,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아이들과 통하는 존재로 10대 청소년들을 생각하게 된 거예요. 어른들이 대신 그 역할을 해도 안될 건 없었지만 사진이 어른들의 매체고 상상력이 아이들의 매체라고 하면 그 중간자적인 단계의 소년들이 실행하도록 하는 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류성희: 애초의 생각을 고스란히 표현한다는 게 쉬워 보이지만, 사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훈련된 방식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힘들잖아요. 요즘처럼 정보량이 많은 세상에서는 더더군다나 어려워요. 심지어 자신을 구성하는 것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 생각 하나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시대를 살다 보니 정 작가님의 뚝심이나 진심을 고스란히 전하려는 부분에서 감동을 받는 것 같아요. 정연두: 저랑 같이 뛰실까요? (웃음)

스튜디오에 대한 판타지는 작업의 원동력

류성희: 그리고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나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 그리고 <수공기억> 같은 작품을 보면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에 재능도 있으신 것 같아요.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수공기억>의 경우 노인들을 인터뷰해서 그분의 기억을 영상으로 실현시킨다는 내용인데요. 누구나 그렇듯 기억이란 완벽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조작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 작업의 포인트는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서 충분히 조작될 수 있는 그 기억들을 실현시켜서 위안을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단지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이 팩트 자체가 흥미로웠던 건지….

정연두: <수공기억>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영감을 얻었는데요. 사람의 기억을 소재로 해서, 충실한 다큐멘터리 형식과 영화 세트장에서 완성되어가는 풍경 두 가지를 동일한 이야기라는 강박없이 병치시킨 거였어요. 사실임을 표방하는 매체와 가짜임을 표방하는 매체를 붙인 거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둘이 교차되기도 해요. 한 예로 어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탈영병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본 육간대청 기와집 이야기를 할 때, 옆 화면에서는 세트에서 기와집을 만들고 있죠. 2m짜리 얄팍한 세트지만 완성한 다음 특정한 렌즈로 특정 거리에서 잡으면 정말 육간대청 같거든요. 그리고 영화적인 조명이 태양광처럼 쏟아지면 그 세트가 일순간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보였어요. 바로 그때 할아버지가 말한- 왜곡되거나 거짓일 수도 있는- 이야기와 세트의 영상이 교차되는 거죠. 그 지점이, 저는 <수공기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 작업방식은 단순해요. 아이디어가 풍부해서 그것들을 엮어낸다기보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씩 부딪쳐나가다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식이죠. 영화쪽에서 일하는 분들을 보면서는 ‘정말 계획을 잘 세워야겠구나’라고 많이 느껴요. 여러 변수까지 염두에 둬야 하고 사람 다루는 데도 내공이 있어야 하고…, 그런 작업에 비하면 제 방식은 정말 바보스럽죠. 반대로 제가 감독님께 궁금한 것은, 직접 메가폰을 잡게 된다면 어떤 작품을 해보고 싶으시냐는 거예요.

류성희: 저는 뮤지컬을 해보고 싶어요. 한국의 풍토는, 영화쪽도 리얼리즘에 익숙하잖아요. 진짜 사실처럼 느껴져야 하고. 그런데 나이를 좀 먹다 보니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것은 가짜고 세트이니 돈을 내고 들어와서 가짜 경험을 즐겨라’라고 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 미술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서포팅을 하는 직업인데다가,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필터링을 거치고 숙련화되어서 그런 작업을 하기 힘들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두려워요.

정연두: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제가 영화를 만들게 될 확률보다는 감독님께서 영화를 만들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것 같아요. (웃음) 이야기 중에 느끼셨겠지만 제가 봐온 영화들은 죄다 한쪽으로 쏠려 있거든요.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쏠려 있는 경험들이 제게 나름 좋은 판타지를 제공해준 셈이 되었다는 거예요. 스튜디오에 대한 판타지죠. 여튼 오늘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다른 분야의 분들을 만나는 일도 즐겁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재미있는 생각을 가진 분이라면 함께 일을 해도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그건 확실해요.

류성희(1968년생) 홍익대학교 도예과 졸업. 도예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마친 뒤 1998년에 도미하여 미국영화연구소(AFI)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귀국 뒤 <꽃섬>(2001)에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며 영화 프로덕션디자이너로 데뷔.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살인의 추억>(2003), <올드보이>(2003), <달콤한 인생>(2005), <괴물>(2006), <헨젤과 그레텔>(2007), <박쥐>(2009), <마더>(2009), <만추>(2010) 등의 작품에서 미술감독을 맡았다.

정연두(1969년생)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귀국 뒤 2001년 <보라매 댄스홀전>으로 작품 활동 시작. 대표적인 작업으로 <내사랑 지니>(2003~), <로케이션>(2005),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7), <수공기억>(2008) 등이 있으며, 현재 지난해 일본과 미국에서 선보인 <씨네매지션> 퍼포먼스의 국내 초연(4월26~27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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