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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디지털 시대의 상상력

파타포와 닌텐도 Wii

지난호에 실린 ‘파타피직스 서설’을 통해 독자들은 파타피직스의 세계에 입문했다. ‘파타피직스’가 ‘메타피직스’의 패러디라면 ‘파타포’(pataphor)는 ‘은유’를 의미하는 메타포(metaphor)의 패러디다. 과거의 시인과 화가들이 메타포의 대가였다면 현대의 파타피지션들은 파타포의 명인이라 할 수 있다. 파타포는 그저 몇몇 괴짜들의 해괴한 지적 유희에 불과한 게 아니다. 오늘날 그것은 대중의 일상을 지배하는 체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제프리 쇼의 말대로 “현대인은 파타피지컬한 종(種)이 되어가고 있다”.

메타포에서 파타포로

메타포와 파타포는 어떻게 다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는 ‘두개의 상이한 사물 사이에서 불현듯 유사성을 깨닫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체스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전투의 시뮬레이션이다. 하지만 진짜 전투에서 이루어지는 기동은 물론 보드 위에서 말들이 움직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현상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하여, 하나를 다른 하나의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체스는 전투의 ‘은유’라 할 수 있다(이는 물론 문학에서 사용하는 ‘은유’의 개념보다는 훨씬 느슨한 것이다).

메타포의 경우 자신과 현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녀의 얼굴은 실제로는 꽃이 아니며, 그녀의 눈은 실제로는 호수가 아니며, 그녀의 허리는 실제로는 개미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장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아무리 전투를 시뮬레이션한 것이라 해도,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투는 보드판 위의 놀이와는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이다. 체스판 위에는 포성도 없고, 포연도 없다. 총상 입은 부상자도, 포격으로 잘려나간 신체 부위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상상해보자. 가령 미군 병사와 탈레반 전사들이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괴상한(uncanny)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이미 우리 일상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는 해리 포터 일행이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체스 피겨들과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현실의 인간은 체스판이라는 은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일부가 된다. 이것이 바로 파타포, 즉 파타피지컬한 상상력의 전형적 형태다.

여기서 독자들은 당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릴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루이스 캐럴은 체스판의 기보(碁譜)를 모델로 앨리스의 이야기를 구상했다. 이로써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벌인 모든 모험은 체스판 위의 말의 움직임이 된다. 실제로 테니얼 경이 그린 삽화에는 이상한 나라의 들판이 흑백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스 모양을 하고 있다. 결국 현실의 소녀가 피겨가 되어 체스라는 은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이제 독자들은 파타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을 잡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앨리스는 여왕이 되어 왕관을 쓴다. 이는 체스의 졸(pawn)이 마지막 칸에 도달했을 때는 여왕(queen)이 된다는 체스의 규칙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게이머들 역시 게임의 세계로 들어가 거기서 허구의 존재들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앨리스의 체험은 그것과 조금 다르다. 게이머들은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가상의 신체를 입지만 앨리스는 현실의 육체를 가지고 거기에 입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앨리스의 체험은 제대로 파티피지컬하다고 할 수 있다.

체스에 대해 얘기한 것은 물론 카드놀이에도 적용된다. 토끼굴 속과 거울 뒤에서 앨리스는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만 만나는 게 아니다(이들은 물론 체스의 피겨들이다). 앨리스는 거기서 카드의 병사들에게 쫓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현실의 몸을 가지고 체스와 카드라는 은유의 세계 속에 들어가, 그곳에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들과 대결을 한다. 여기서 은유와 현실은 단 하나의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병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야말로 파타포의 정수라 할 수 있다.

화투에서 콘솔로

‘닌텐도’(任天堂)의 역사는 게임의 상상력이 메타포에서 파타포로 변모해왔음을 보여준다. 닌텐도는 1889년에 화투를 제조하는 회사에서 출발했다. 50~60년대에는 러브호텔과 음식 체인점 등에 손을 대며 사업의 다각화를 시도하다가, 1973년 라이트 건을 이용한 게임으로 재미를 본 뒤, 1975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비디오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닌텐도 신화의 시작이다. 그 뒤의 역사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게임 콘솔 10개 중에서 4개가 닌텐도의 것이라고 한다. 화투에서 비디오 게임으로 넘어감으로써 닌텐도는 게임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화투가 은유적 방식으로 막연히 현실을 지시한다면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새로운 가상의 세계로 몰입시키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달로 최근 몰입의 강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이 발전에는 파타피지컬한 측면이 있다.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 거기서 미션을 수행하는 플레이어의 모습은 체스판 위로 올라가 붉은 여왕과 한판 대결을 벌이는 앨리스의 모험은 서로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닌텐도 Wii는 발전의 또 다른 단계라 할 수 있다. 예전의 비디오 게임에서 인간은 가상현실 속에 가상적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동작 감지 장치가 장착된 콘솔의 등장으로 인간은 현실의 육체를 가지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예전의 핑퐁 게임에서 인간이 움직이는 것은 그저 손가락뿐이었다. 하지만 닌텐도 Wii의 경우 핑퐁 게임을 하려면 온몸을 움직여 실제로 핑퐁 게임을 하는 동작을 취해야 한다. 닌텐도 Wii와 더불어 게임은 제대로 파타포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메타포에서 파타포로

닌텐도 Wii 이전에 파타포를 구현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항공이나 군사 영역에서 사용되는 시뮬레이터가 그것이다. 하지만 닌텐도 Wii는 이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뮬레이터의 경우 육중한 장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닌텐도 Wii의 경우 일상의 환경 속에서도 장비를 통해 가상에 입장할 수가 있다. 나아가 시뮬레이터가 그저 하나의 가능세계에 고정되어 있다면 닌텐도 Wii는 수많은 가능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닌텐도 Wii는 파타포의 온전한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모바일의 발전으로 가상현실이 증강현실로 변모하고 있는 것도 파타포의 발전의 유리한 조건이다. ‘증강현실’의 개념 자체가 ‘현실과 가상의 층위의 중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햅틱 디자인의 본질 역시 파타포의 구현에 있다. 예를 들어 아이폰을 생각해보라. 화면을 두 손가락으로 벌리면 화면 속의 페이지가 확대되고, 휴대폰을 기울이면 맥주잔을 기울일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맥주가 흘러내린다. 오늘날 가상의 사물은 아날로그 세계 속의 진짜 사물을 대할 때와 똑같은 신체의 동작을 요구한다.

오늘날 파타포는 그저 몇몇 예술적 엘리트들의 해괴한 상상을 넘어서 대중적으로 요구되는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원리다. 이렇게 은유와 현실의 중첩되는 시대에는 상상력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메타포의 능력이었다. “운율을 맞추는 것은 가르칠 수 있어도 은유를 만드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오늘날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파타포의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상상력의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