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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시네마나우] 도시, 역사, 그리고 영화-에세이

<늑대의 입>을 보고 ‘영화에 나타난 도시’를 생각하다

<늑대의 입>

새로 연재되는 칼럼에서 처음 다룬다는 것이 ‘영화에 나타난 도시’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식상한 주제라고 치부하면서 곧바로 이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것이다. 물론 그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도시의 풍경을 담은 지난 세기의 이미지들(영화, 뉴스릴, 텔레비전, 광고 등등), 즉 이제는 조금 달라졌거나 원래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변모된 그런 도시의 풍경이 담긴 이미지를 활용한 에세이적 다큐멘터리들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흥미로운 것이 될까?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올 초에 본 한편의 걸출한 데뷔작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말하기 위해서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 기존의 영상자료를 활용한 도시-에세이들이 잇따라 나온 것은 우연히 그리된 것이라고만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얼른 떠오르는 대로 몇편의 중요한 영화들만 언급해보면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가 10년간 최고의 영화 10편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한) 톰 앤더슨의 <로스앤젤레스 자화상>(2003), 가이 매딘의 <나의 위니펙>(2007), 테렌스 데이비스의 <리버풀의 추억>(2008) 그리고 피터 폰 바흐의 <헬싱키, 포에버>(2009) 등이 있다. 이런 작품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 머릿속의 상상적 아카이브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아카이브에도) 도시 자체와 그 재현방식의 변천을 추적할 수 있을 만큼의 이미지들이 축적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물론 100년이 넘는 영화사 자체가 부분적으로- 왜냐하면 모든 국가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지난 세기 이미지들이 겪은 ‘대량학살’의 역사를 떠올려보라- 그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이들 영화들은 동시대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사적, 허구적 요소들이 차지하는 역할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외양상으로는 기존의 영상자료들을 활용한 다큐멘터리이지만 내레이션과 편집을 통해 은밀히 서브플롯을 구축하거나 드물게는 연기라고 하는 전적으로 허구적인 요소까지도 끌어들이는 식이다. 따라서 재현의 결과물들을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한 뒤 재구축하는 이 도시-에세이들은 매우 21세기적인 도시교향악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형식과 스타일 및 정치적 태도에 있어선 알베르토 카발칸티가 만든 최초의 도시교향악 <오직 시간뿐>(1926)이나 장 비고의 <니스에 관하여>(1930)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의문은 혹시 이 장르가 자신들이 활용하고 있는 이미지의 역사에 걸맞은 신체적 연령을 지닌 이들에게서만 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톰 앤더슨과 피터 폰 바흐는 1943년생, 테렌스 데이비스는 1945년생, 가장 ‘어린’ 가이 매딘은 1956년생이다). 이때 20세기 초·중반에 자신이 직접 연출한 작품들을 끌어오고 있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1908년생)의 <포르투에서의 어린 시절>(2001)은 대단한 압력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추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에서 상영된 33살의 이탈리아 감독이 만든 영화 때문이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장편 데뷔작 <늑대의 입>(2009)이 바로 그것이다. 제노아라는 도시의 역사가 담긴 일련의 영상자료들을 그곳에 사는 한 전과자- 감독을 대신해(?) 이미지의 역사에 걸맞은 신체적 연령을 지닌- 의 현재와 교차시키고 있는 이 영화는 사실 범주화가 거의 불가능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상영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한국의 관객이 올해 안에 어딘가에서 이 작품을 꼭 만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 지면관계상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는 그 이후로 미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