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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하고 새끈한 로맨틱코미디 <내 깡패 같은 애인>
주성철 2010-05-19

<내 깡패 같은 애인>은 별 볼일 없는 삼류 건달 얘기다. 그러고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많다. 일단 <파이란>(2001)에서 조직 후배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입만 살아 오락실을 전전하던 강재(최민식)와 무척 닮았다. 한창때 같이 구르던 친구 용식(손병호)이 어느덧 보스로 성장한 상황도, 이제는 동네에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며 친구(박원상) 밑에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처지도 비슷하다. 말하자면 모두가 꺼려하는 쓸모없는 남자다. 대신 교도소에 갔다 오면 조직의 ‘에이스’가 될 수 있을 거란 부추김에 기꺼이 누명을 뒤집어썼지만 그건 그냥 없던 얘기가 됐다. 그저 적당히 체념하고 살아야 편한 게 세상이다. 요즘 영화들 중에서는 양익준의 <똥파리>(2008)가 떠오른다. 조직 내에서는 늘 함께 다니는 어린 후배(권세인)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사적으로는 욕을 좀 덜하고 여자친구에게 좀더 나긋나긋하고 귀여운 ‘나이 든 똥파리’가 바로 박중훈이라고 할까.

조직에서 거의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삼류건달 동철(박중훈)의 반지하 옆집으로 참하게 생긴 젊은 여자 세진(정유미)이 이사 온다. 동철이 대뜸 반말로 ‘옆방 여자’라 부르는 세진은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취업해서 올라온 지방대생이지만, 회사가 부도나면서 다시 열심히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니는 중이다. 동철은 비 오는 날 면접을 보러 가야 하는 세진의 우산을 들고 나가버려 그녀를 어이없게 고생시키기도 하지만, 영양실조로 쓰러진 세진을 응급실로 옮겨다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그래봐야 분식집 라면에 불과하지만 함께 식사도 하고 술잔도 기울이면서 가까운 사이가 된다. 급기야 동철은 세진이 고향집에 데려갈 가짜 남자친구 행세까지 해주게 된다. 한편, 조직은 다른 조직과 결탁한 전직경찰(정인기)의 등장으로 곤란을 겪는다.

<내 깡패 같은 애인>은 얼핏 ‘박중훈의 영화’처럼 느껴지지만 이른바 ‘88만원 세대’인 세진의 고통도 현실감있게 잘 녹여냈다. 후배들이 수시로 비웃는 가운데 새로 등장한 전직경찰을 처리해야 하는 동철의 난감함은, 면접 때 면접관들의 장난으로 율동과 함께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부를 수밖에 없는 심란한 처지와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면서 영화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영리하게 잘 비켜간다. 설정은 도식적이지만 그 전개는 참신하다. 박중훈과 정유미 두 배우가 서로 교집합이 없는, 전혀 다른 세대에 속한 배우들임에도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여러 장면들이 예쁘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건 그런 과정이나 디테일이 억지스럽지 않다는 거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처한 위치가 힘들어서인지 두 사람이 연인관계로 발전한 이후에도 지루하고 억지스런 밀고 당기기가 없다. 동철이 룸살롱에서 합기도 사범들에게 구타당하는 장면 등 좀더 과도하게 웃기거나 액션을 더할 수 있는 장면들도 결코 오버하지 않는다. 장르적으로 좀더 요란한 솜씨를 뽐낼 수도 있겠지만 철저히 현실감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순전히 한눈팔지 않고 이야기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김광식 감독의 담백한 역량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반가운 것은 박중훈의 당당한 귀환이다. 순식간에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와 <게임의 법칙>(1994) 사이를 오가는 그의 표정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면접 때 무조건 꿇어서 사정하면 안되냐”고 순진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게임의 법칙>에서 보스 유광천(하용수) 앞에 무릎 꿇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그가 사이판으로 떠날 계획만 안 세웠다면 지금의 동철처럼 돼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한때 <무릎 꿇지 마>라는 제목을 갖고 있기도 했다. 전혀 과잉으로 느껴지지 않게 웃음을 자아내는 자연스러움도 좋다. 순전히 말과 표정으로 웃기는 배우의 최고봉이 박중훈이었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정장을 입고 등장한 것 같은 정유미의 모습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의외로, 아니 정말로 잘 어울린다. 군더더기없고 기분 좋게 웃고 울리면서, 팍팍한 가운데 은근히 해피엔딩을 바라는 관객의 욕망도 잘 어루만지는 매끈하고 새끈한 로맨틱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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