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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하고 시원한 한 줄기 바람 같은 영화 <여행>

<길> 이후 4년 만에 찾아온 배창호 감독의 <여행>은 청량하고 시원한 한 줄기 바람 같다. <여행>은 <여행> <방학> <외출>의 세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뚜렷한 상징이나 연결고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감독의 말처럼 통일된 서사로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의 중심에는 제주도라는 공간이 있다. 영화는 제주도를 찾아온 사람들과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길가기로 가득하다. 건국대 제자들과 함께 찍은 첫 번째 단편 <여행>은 공모전을 앞두고 사진 촬영을 위해 제주도를 찾아온 대학생 남녀의 자전거 여행을 담았다. 당시 중2였던 딸과 같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방학>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여중생 수연이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제주도 현지에서 캐스팅한 배우들의 구수한 사투리와 입담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배창호 감독의 부인인 김유미씨가 주인공 은희로 출연한 <외출>은 일상에서 도발적 외출을 감행한 한 중년 여자의 제주도 여행기를 다룬다. 겉보기엔 단순한 여행기를 다룬 것 같은 이 영화에서 청량한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가? 감독은 <러브 스토리> 이후 다시 동시대로 시선을 돌렸다.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둔 뒤 3년 동안의 인고의 과정을 거친 <여행>은 전작들 사이에서 확실히 방점을 찍는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화면에서 보여주는 변화는 단순히 필름에서 디지털이라는 매체의 전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의 기억을 떨쳐내려 했다는 배창호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정보와 전달의 작위성과 강박을 덜어내고 사소함에서 듣는 기쁨과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소재 자체도 그러한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행>은 공간에 대한 영화이다.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공간에 대한 작업은 기억에 대한 작업으로 이어진다. 세 단편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모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세 단편은 서사적으로는 연결되지 않지만 그들이 찍는 공간과 사진 찍는 행위로 연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산다는 것은 이러한 상실의 체험과 맞닿아 있다. 우리의 삶은 일상에서의 공식적인 삶 이외에도 고독이 지나간 흔적들로 만들어지는 삶이 있다.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고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만이 껴안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삶의 길들이 우리의 삶을 실재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은 그러한 고독과 맞닿아 있다. 사진은 시간을 역류한다. 사진은 과거라는 시간관념을 뒤엎는다. <외출>에서 은희는 전직 학원 원장에게 현재완료와 과거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설명을 들은 은희는 “말로는 쉽지”라고 말한다. 과거는 지나갔지만 면밀히 우리에게 살아 있다. <여행>은 보편화될 수 없고 소통될 수 없는 고독의 흔적들로 만들어지는 실제 우리의 삶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배창호 감독은 이러한 충만한 시간을 애써 의도적으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첫 번째 단편 <여행>에서 대학생 남녀는 사랑해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랑이나 행복은 슬쩍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지나갈 때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랑과 행복에 대해 우리는 늘 과거형으로만 얘기할 수 있다. 대학생 남녀는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들은 같이 컵라면을 먹을 뿐이다. 잊혀지기도 전에 잊혀질 것과 맞닿아야 그러한 허무 속에서 감독은 애써 그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여행>이 가지는 힘과 전작들 사이에서 방점을 찍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컵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컵라면을 먹었던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렸다. <여행>은 진수성찬이 아니다. <여행>은 컵라면 같은 영화다. 건강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가치체계 속에서 누구나 다 먹을 수 있고 먹어보았지만 배가 고파야만 맛을 알 수 있는, 그리고 누구나 다 컵라면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만 그 맛과 추억을 잊고 지내는 그런 컵라면 같은 영화다. 두 번째 단편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작위성과 강박을 말끔하게 떨쳐내지 못하는 약점을 보이며 컵라면도 그 속에서 묻히는 듯 보이지만 영화는 그러한 단점들을 무마시키며 거대한 장식이나 치장없이도 이미 경험했고 알고 있지만 잊고 있었던 그런 충만한 시간들을 한 줄기 시원한 바람으로 우리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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