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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or/actress] <하녀> <하하하> 배우 윤여정
김용언 사진 오계옥 2010-05-21

연기는, 답 없는 길을 그냥 가는 거야

소녀의 사랑스러움과 노인의 지혜. 이 두 가지가 동일한 육체 안에 공존할 수 있을까. 그녀를 직접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화면을 통해서만 듣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생각지도 못한 소박함과 일상성을 품고 있을 때, 그저 추억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한국영화사의 한 단면이 겹칠 때 실로 감동적이었다. 실제와 허구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며 여유와 유머를 적절하게 배합했던 <여배우들>, ‘엄마’와 ‘여자’를 동시에 보여주는 <하하하>, 현실적이고 속물적이지만 끝내 스스로를 해방시켰던 <하녀>. 전개상 필요한 역할이 아니라, 그 자리에 바로 그 모습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역할들. 영화도 좋았고, 거기서 큰 존재감을 발휘한 배우 윤여정도 좋았다. 우리에게는 이 배우, 윤여정이 있었다.

홍 감독에게 현장에서 막 성질 부렸지만…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 텔레비전 배우들이 놀려요. 영화배우로 거듭났다고. (웃음) 기분 좋죠. <여배우들>은 만날 같이 영화 보러 놀러다니던 이재용 감독과 나와 (고)현정이가 한번 해보자고 뭉친 거였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가 현실화된 것 자체가 참 기뻤어요. 우리끼리 행복하게 찍었고, 완성된 영화 보고 나선 다들 즐거워했어요. 지우까지 “선생님, 나 그때 그거 할걸 그랬어요”라고 후회하더라고. 촬영할 때 원래 넣으려던 장면이 있는데 지우가 못한다고 그랬어요. 내가 “그걸 깨야 해 지우야, 그걸 깨고 나가면 아무 소리 없을 거야”라고 했는데 결국 포기했었거든. 보고 나서 안타까워하더라고요. 내가 늘그막에 이런 젊은 감독을 알아서 큰 선물을 받았구나 싶었어요. 이 감독이 아주 예쁘게 얘기했어요. <여배우들>은 선생님 소장품으로 갖고 계시라고. 사람이 나이 들면 혼자 감동을 잘해요. <여배우들>은 이재용 감독이 나 같은 노배우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이미숙이 ‘선생님이 중심에 계셔서 우리 영화가 빛났어요, 선생님, 잘난 척하셔도 돼요’라는 문자를 보내줘서 제일 기뻤어요. 동료한테 인정받거나 감사받을 때가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게 보람이었어요.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 원래 <밤과낮>에서 김영호씨 엄마로 출연할 뻔했어요. 하루 정도만 촬영하면 되는 분량이었는데 결국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했지. 지난해 6월 <여배우들> 찍을 때 홍상수 감독을 만났는데 <하하하> 얘기를 하더라고. <밤과낮> 정도 분량을 생각하고 그러마라고 했지. 7월에 통영 내려갔는데, 분량이 엄청 많은 거야. 아주 죽을 고생을 했어요. (웃음) 젊은 배우들이야 한달 내내 거기서 찍었지만 난 뭐 늙은 사람이 걔네들하고 놀 일도 없고 그 술을 어떻게 다 먹어. 서울하고 통영을 왔다 갔다 하느라고 힘들었어요. 사람이 참 미련한 게 자기가 당하지 않으면 몰라. 현정이한테 홍상수 감독 연출 스타일을 다 들었는데 잊어버렸던 거지. 잘하는 배우들이 전부 단역으로까지 나올 순 없으니까, 비전문 배우들까지 같이 찍게 되잖아. 근데 감독은 자기 원하는 장면을 뽑아낼 때까지 재촬영을 해야 하니까. 상황은 다 이해를 하는데, 늙어서 체력이 안되는데 뭐. 나 같은 경우는 테이크를 세번 이상 가면 더이상 안 나와요. <하하하>에선 20, 30번씩 테이크를 가니까 힘들었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막 성질 부렸거든. 시사회 때 보니까 내가 제일 연기 못한 거 같아 미안하더라고. 사과도 했어요. (웃음)

<하하하> 속 문경과 엄마의 관계 아들들이 다 그래요. 자기 엄마가 엄마여야지 여자인 걸 싫어해. 내가 문경이 회초리 때리는 장면 찍을 때도, 홍 감독의 참 섬세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게 자꾸 나보고 속옷 끈 내놓으라고. (웃음) 엄마 입장에서도 그렇지. 엄만 본능적으로 다 알아요. 정화가 없어지고 내 아들이 없어졌으니까. 문경이가 남자들이랑 시시덕거리는 엄마 보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엄마도 그래요. 내 아들이 물론 성인인데, 다른 여자와 다른 짓을 하는 게 또 그런 거야. 물론 정화를 예뻐하지만, 내 아들하곤 아닌 거야. 그런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요.

김기영과 임상수는…

고 김기영 감독과의 인연 생각해보면 김기영 감독님과 내 인연이… 아마 그런 게 인연일 거예요. <화녀> 때 너무 고생해서 ‘영화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지경인데 약값이 없는 사람 아니면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웃음) <화녀> 다음에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도 죄다 거절했다가, 어쩔 수 없이 <여대생 또순이>를 찍었어요. 사실 안 하려고 출연료를 일부러 높이 불렀는데 그 자리에서 돈을 내놓더라고. (웃음) 난 그때까지 감독들은 다 김기영 감독님처럼 머리가 좋은 줄 알았어요. 근데 이 영화에선 너무 이상했어요. 윤정희씨가 이 신을 이렇게 찍지 말라고 하면 정말 바뀌고, 엔딩까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거 찍은 다음 김기영 감독님이 또 왔어요. “이거는 내가 미스 윤을 위해 썼다. 미스 윤이 안 해주면 난 못하는 거지 뭐.” 나한테 반말 한번 안 하던 분이에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충녀>를 또 찍었어요. <화녀> 때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그분이 특별하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나봐요. 사실 고생은 <화녀> 때 더 많이 한 거 같아요. 본편에선 편집됐는데, 날 욕조에 넣고 막 물먹이고 그랬어요. (웃음)

내가 김기영 감독님께 마지막까지 잘 못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 2회 때 김기영 감독님 회고전을 하는데, 나한테도 참석해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근데 전화하는 사람이 아주 재수없이 걸었어. 나 바빠서 못 가요, 라고 끊어버렸지. 김기영 감독님이야 뭐 내가 원체 틱틱거리고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걸 잘 아시니까… 그러고선 돌아가신 거죠. 사람이 참, 그렇게 반성하면 안되는데… 그 다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님 유작 <죽어도 좋은 경험>을 튼다고 해서 그땐 내려갔어요. 그때까지도 잘 몰랐는데, 이번에 <하녀>를 찍으면서 마음이 많이 착잡하더라고요. 임상수 감독이 김기영 감독님의 수혜자일 수 있어요. 촬영 내내 내가 감상적이었거든. 24살 때 철없던 내가 <화녀>를 찍으면서 힘들다고 툴툴거렸던 게 너무 후회되더라고. 그때 못했던 걸 임상수 감독한테 다 했어요. 사람이 그렇게 바보야, 그분한테 그랬었어야 하는 걸 애꿎은 임상수 감독한테 다 해준 거지. (웃음) 하라는 대로 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아요. 인생이라는 게 참 그래요.

임상수 감독, <하녀>, 병식 <바람난 가족> 현장에서 임 감독 디렉션 보면서 김기영 감독님하고 닮은 데가 참 많다고 느꼈어요. 혹시 <하녀>나 다른 영화를 봤냐고 물었더니 잘난 척하면서 ‘뭐 전 그냥 별로…’ 하더라고. (웃음) 부부로 나왔던 김인문씨랑도 얘기했는데, 그분 말이 더 히트였어. “아냐, 쟤는 김기영보다 더 ‘또라이’야.” (일동 폭소) <하녀>에서 도연이가 연기하는 은이가 미스터리하잖아요. 백치 같기도 하고, 알고 저러는 건가 모르고 저러는 건가 싶은데. 그런 점이 바로 김기영 감독님이 나한테 요구했던 거거든요. 그거 보면서도 둘이 참 많이 닮았다고 다시 한번 느꼈죠.

처음 <하녀> 시나리오 읽었을 땐 대체 뭐라는 거야 싶었어요. 병식이래서 남잔 줄 알았어요. (웃음) <바람난 가족>에서 내 역할 이름이 병한이였거든. 병 자 돌림을 좋아하는구먼 하면서 읽었어요. 내가 아무 답을 안 주니까 임상수 감독이 전화를 걸었어요. “글세, 난 잘 모르겠어”라고 했죠. “제가 시나리오를 못 썼다고 생각하시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더라고요. 멋있었어요. 임상수 감독 스타일이 좀 그래요. 어떤 감독들은 완만하게 표현하죠. 모든 관객에게 친절하고. 임상수 감독은 김기영 감독님처럼 뚝뚝 생략하니까, 굉장히 강하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병식한테 살을 붙여줬어요. 그 집에 아주 오래 있었던 여자, 미희(해라의 엄마)한테 오래 헌신했고 아들을 검사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견뎌낸 여자, 그 집안의 모든 걸 다 아는 여자라고.

처음에 의상 가봉할 때도 감독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임상수 감독이 그중 스커트 하나를 더 짧게 만들고 싶어 했는데, 내가 질색을 했거든. 이제는 알겠어요. 아마 병식이를 좀더 여자로 보이게 하려고 의도했던 거 같아요. 그 여자한테도 무슨 사연이 있었을 수 있잖아. 늙었지만 여전히 섹시해 보이는 여자, 은이랑 똑같은 일을 겪었을 수도 있는 여자거든. 그래서 병식이 와인 마시는 장면에서도 임상수 감독이 자꾸 치마를 좀더 올리라고 그랬는데… 시사회 보고 나서 후회했어요. 만날 후회해.

엔딩 때문에 말이 많겠지만, 이게 임상수지 싶더라고. 자기 터치를 잃지 않는 거지. 잘사는 사람들을 로봇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사실 그 엔딩 직전에 내가 집을 나서면서 펑펑 우는 장면도 이틀이나 찍었는데 편집에서 빠졌어요. 그래서 내가 막 뭐라고 그랬어. (웃음) 난 임상수 감독보고 좀 친절하라고, 군더더기도 붙이면서 설명을 하라고 잔소리를 해요. 어느 날엔가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진심은 아니야. 그냥 흥행하라고….” (웃음)

내가 자랑스럽다, 오래 살아서

임상수 감독 아버님이 영화평론가 임영씨예요. 옛날에 임영 평론가가 김기영 감독님 영화를 무지 비판했대. 그래서 김기영 감독님이랑 정일성 촬영감독님이 집까지 찾아갔대요. 따지러. (웃음) 참 재밌잖아요? 그 아들이 그 감독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하녀>에서 병식의 목욕장면 찍을 때, 욕조에 두세 시간 앉아 있으면서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돌고 돌아 우리가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르는 거다. 내가 <화녀>를 찍고 40년 뒤에 <하녀>에 다시 출연하다니, 내가 자랑스럽다, 오래 살아서. (웃음)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어릴 땐 나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내가 진짜 연기 잘하는 줄 알았어요. 십 몇년 공백 다음에서야 내가 못한다는 걸 알았어. 내 말소리가 들리고, 내 몸이 뜻대로 안 움직이고. 30대 말인데, 굉장히 처참했어요. 너무 심하게 바닥을 친 거지.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기 시작한 게 쉰살 무렵이에요. 이제 60이 넘었는데, 다들 너무 잘해요. 문소리도 잘하고 전도연도 잘하고, 나도 내년부터 더 잘해야겠다는 희망이 생겨요. 연기라는 게 끝없는 도전이에요. 나 혼자서 끊임없이 장애물 경기를 하는 거예요. 완벽한 연기는 있을 수도 없고, 운때가 잘 맞아떨어지면 잘했다는 소릴 듣는 정도죠. 우린 우매하니까 남들이 잘했다면 진짜 잘한 줄 아는데 그건 착각이에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데 정답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걸 잘했다 못했다 맞았다 틀렸다를 말하는 게, 답 없는 길을 그냥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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