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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거센 풍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침입하고…

더 심심하고 낮은 데로 임한 <시>의 어떤 비극적인 풍경의 완성

<>에서 이창동은 패를 다 까고 판에 임하는 도박사와 같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대충 감이 잡히는 상태에서 2시간여를 끌고 가는 뚝심이 경이적으로 느껴질 즈음, 바닥까지 내려간 이야기의 리듬이 서서히 고조되는데, 마지막 20여분 동안 치고 올라오는 고통 속의 마음 출렁임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이 영화의 관점에 따르면 그건 주인공 할머니 미자, 오로지 그녀만 보게 되는 아름다움 속의 고통, 혹은 고통 속의 아름다움이다.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심한데 푼수기 있고 백치적 천진함이 있는 이 할머니만 거기 도달한다.

이창동은 이미 <밀양>에서 더 심심하고 낮은 데로 임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종찬이라는 캐릭터는 알 수 없는 삶의 운명 앞에 서서 스스로의 무력함에 이를 악물며 버티는 겸허함을 보이는 신애와 달리 실실거리면서도 그 고통의 내재화를 무의식적으로 이뤄내는 인간 존재의 고양된 순간을 보여준다. 그걸 이뤄낸 것에 이창동 영화의 작은 전환점이 있다. <>의 여주인공 캐릭터 미자는 종찬의 확대된 버전이다. 겉으로 심심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녀의 삶에 어마어마한 윤리적 운동을 깔아놓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적인 이 영화는 우연히 문화회관에서 여는 시 강좌에 출석한 미자가 결국 시를 쓰게 되는 한달여의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시를 써본 적 없는 미자는 하필이면 알츠하이머병 초기 증상을 겪는 인생 말년에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딸에게도, 주변 이웃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녀의 열망은 결국 관객만 아는 형태로 완성된다. 그런데 매우 비극적인 형태로 완성된다.

시상은 그녀에게 어떻게 찾아오는가

<>에서 미자가 보여주는 푼수기와 허용은 관객인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 아니다. 그녀의 푼수기는 오히려 타자를 향한 접촉과 공감을 향해 열려 있는 긍정적 자질이다. 영화 초반에 병원에서 다른 사람의 가방에서 나는 휴대폰 소리를 자기 것으로 착각해 찾고 있다가 남의 것으로 판명되자 멋쩍게 웃으면서 옆사람을 그녀가 쳐다볼 때 옆사람은 그녀의 미소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미자가 진찰을 받고 병원 앞을 걸어 나올 때 화면에는 딸의 죽음에 오열하는 여중생 박희진 엄마의 모습이 나타난다. 카메라는 긴 동선으로 미자와 희진 엄마의 모습을 커트 없이 한 공간에서 이어준다. 연출로 맺어준 이 공간 속의 동시 출현의 느낌은 주변 일에 반응하는 미자 캐릭터의 마음과 조응하는 것이며 이는 그녀가 시를 쓰는 자질과도 통한다.

미자가 나가는 시 강좌에서 저명한 김용탁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한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 거듭 변주되는 모티브인데, 미자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시상은 주변에 있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미자가 무의식적으로 체화하는 것은 훨씬 뒤에 아주 잔인한 순간에 일어난다. 처음에 미자는 부질없이 초등학생처럼 시인의 말에 문자 그대로 매달린다. 시인이 본다는 것의 예로 든 사과를 집 식탁에 놓고 앉아 미자는 그걸 뚫어지게 바라본다. 외손자 종욱의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아이들이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 궁금해 방 안에 들어가 사과를 줄까 권유했다가 타박받은 뒤에 미자는 사과를 보고 혼자 중얼거린다. “사과는 역시 보는 것보다 깎아먹는 거야.” 사과는 정관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먹어버리는 대상이다. 아직 그녀는 미적 세계의 입구에 들어서지 못했다.

약간 희극적으로 되풀이되는 후속 상황에서도 미자의 그런 방황은 계속된다. 동네에 있는 큰 나무 한 그루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미자에게 지나가던 할머니가 뭘 보냐고 묻는다. 나뭇잎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그때 종욱이 관련돼 있는 여중생 자살 사건의 어느 가해자 아버지에게 전화가 온다. 아름다움을 보려 했으나 고통까지 보게 되는 상황은 이렇게 다소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축적된다. 미자가 시 한편을 쓰는 것은 영화의 목표이자 도달점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시 한편을 쓰기 위해 통과하는 과정은 시인의 말대로 시상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시상은 미자에게 뜻하지 않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그때까지 미자는 예쁘게 세상을 탐색하는데 거기서 자꾸 원래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을 본다. 여중생 박희진 사건의 전말을 가해자의 학부모 모임에서 알고 난 뒤에 미자가 종욱의 학교에 갔을 때 미자는 노는 아이들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최초의 시 비슷한 것을 쓴다. ‘새들의 노랫소리 무엇을 노래하나.’ 그녀가 텅 빈 복도 끝에서 아이들의 성폭행 현장이었던 과학실습실을 들여다볼 때 그녀의 얼굴은 코가 약간 눌려 일그러져 보인다. 노는 아이들 소리, 새소리, 그건 미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미자는 대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느끼고 싶지만 대상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상은 뭔가 그녀에게 잔인한 진실을 깨닫게 한다.

보는 일과 보이는 일

미자가 나가는 아마추어 동호인 시낭송회에서 누군가가 읊는 자작시는 좀 가관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 부은 손으로 하얀 살 씻어 내리시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홀로 잠깨어 우는 일이다….’ 어쩌고 하는 시는 자기 연민의 넋두리를 감추고 있다. 이는 미자가 영화 중반, 희진 엄마를 만나러 가는 시골길에서 잠시 얻었던 시적 희열 비슷한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미자는 그때 풍경에 흡수되어 자기 동일성을 갖는다.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를 맛본 다음 그녀는 그럴듯한 시 비슷한 것을 쓴다.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여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이것 역시 그럴듯하지만 자기 연민의 발로다. 그 다음 상황에서 미자는 희진 엄마를 만나 실컷 삶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며 도취한다. 살구가 땅에 떨어진 걸 간절하다고 생각했으며 자기 몸을 땅에 던져서 막 깨지고 밟히게 해서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그녀는 자기가 방금 쓴 시를 스스로 해설하는 것이다. 평생 살았어도 살구에 대해 처음 그런 걸 알았다고 만족해하는 미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녀가 희진 엄마에게서 돌아서서 그 길을 나올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사실 희진 엄마에게 합의보자고 사정하려고 온 참이었다. 아름다움을 위장한 자기도취의 그물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녀에게 고통이다.

그 다음 열리는 시낭송회에서 동호회 회원들은 프로 시인들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그곳 회원이자 형사인 박상태는 이날 <너에게 묻는다>라는 안도현의 시를 낭송한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낭송이 끝나고 느물거리며 농지거리를 하는 박상태를 보며 미자는 아름다움을 찾는 건데 와이담이나 한다고 흉을 보지만 그날 밤 회식 자리가 끝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쪼그려 앉아 운다. 박상태가 ‘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 써서?’라고 물으며 그녀 곁에 난감한 듯 서서 보다가 그녀의 옆에 앉는다. 그는 그녀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박상태의 이 연대의 행동은 비로소 자기도취에서 깨어난 끔찍한 상태의 미자가 그때까지 보고 싶었던 것만을 봤던 것과 대비된다.

실은 미자에게 그런 일은 그때까지도 일어났고 그 뒤에도 계속 일어난다. 본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김용탁 시인의 강조는 미자가 보는 것과 미자가 보이는 것의 대비 속에 천천히 축적되어 마침내 ‘시’에서 ‘영화매체’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객에게 체험하게 한다(이는 <밀양>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 모티브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미자는 자기가 병원에서 본 비극적인 사건, 희진의 죽음에 관해 주변에 말하지만 아무도 관심 기울이는 이가 없다. 미자는 혼자서 그걸 봤다고 생각하고 더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가 적극적으로 상황에 끼어들 때 미자는 보는 상태에서 보이는 상태로 바뀌고 그걸 황망스러워한다. 미자가 박희진의 추모 미사에 몰래 참석한 성당에서 희진의 친구로 보이는 한 여중생이 계속 미자를 쳐다본다. 미자는 불편해하며 희진의 사진 액자를 들고 도망치다가 길가에서 어느 남자와 부딪칠 뻔한다.

사건을 관찰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거기 연루되자마자 미자는 보는 상태에서 보이는 상태로 옮겨가고 그건 더욱더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영화 중반, 사건의 내막을 안 뒤 돌보미로 일하는 강 노인 집에서 일을 마치고 그녀가 샤워기를 맞으며 울고 있을 때 강 노인은 목욕탕 바깥에서 그 소리를 몰래 엿듣고 있다. 다음날 아침 미자가 식탁에 놓은 희진의 액자를 배고프다고 식탁에 달려든 종욱이 본다. 미자는 종욱의 반응을 보고 있다. 종욱은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채근하며 그 응시의 강요를 물리치지만 무엇을 그가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밥을 먹고 난 뒤 아파트 앞 공터에서 종욱은 아이들이 훌라후프 추는 걸 가르친다. 여러 컷으로 나눠 찍힌 이 장면에서 종욱은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 있다. 생기있게 관계 속에 있는 종욱의 모습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그 모습을 미자가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적 감각의 모호성을 느낀다.

본다는 것의 정체에 대해 우리를 관찰자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로 연루시켜버리는 것은 나중에 이르러서다. 영화 후반, 미자가 부동산 중개소에서 합의를 보러 온 희진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희진 엄마 집 근처에서 미자가 살구의 아름다움 운운하며 뻘짓을 한 다음이다. 희진 엄마는 미자를 보고 놀라 얼굴이 굳어진다. 미자는 치욕과 염치를 느낀다. 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보인다는 것에 대해. 유리창 너머 말없이 이쪽을 보고 있는 희진 엄마와 미자의 시선은 마주친다. 다시 한번 본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의 이 상관관계 속에서 어느 시인이 강조했던 본다는 것의 중요성은 영화매체의 표현 메커니즘으로 옮겨져 관객에게 질문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침입하는 장면

미자는 봉준호의 <마더>에 나온 혜자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혜자가 자식의 범죄를 표면적으로 감싸고 밀봉한다면 미자는 그 반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비슷한 시선,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다. <마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인, 혜자가 밤에 살인이 일어난 건물 옥상에 올라 무심하게 곳곳에 불이 켜져 있는 마을 전경을 보는 이미지와 맞먹을 만한 것이 <>의 후반부에서 공감각적으로 확산되는 화면들에 있다. 사물이나 풍경은 이 영화에서 미학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초반에는. 미자가 시 강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설거지통도 시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한 선생의 말을 따라 집 안 곳곳의 사물을 볼 때 마치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몇 대목처럼 인서트된 화면들이 보인다. 팬지가 있는 작은 화분, 설거지통에 있는 그릇들, 냉장고에 붙은 사진과 메모가 되어 있는 포스트잇 등은 오즈적인 정물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결코 미학이 될 수 없다. 미자의 시선으로도 연출자의 의지로도 육화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다오면서 알츠하이머 확진 판정을 받은 미자가 버스에서 바깥 풍경을 볼 때 그녀는 풍경에서 자신의 심상을 본다. ‘시간이 흐르고 꽃도 시들고’라고 그녀는 공책에 적는다.

여기까지 바깥에 존재했던 풍경은 서서히 주인공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미자가 여중생이 빠져 죽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어느 한적한 시골 강 콘크리트 다리 위에 섰을 때 미자의 뒷모습이 프레임된다. 그녀가 먼 풍경에 망연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녀의 모자가 강에 떨어진다. 검푸른 강물이 보인다. 풍경은 더욱 가깝게 다가오고 미자가 다리 밑 부근에서 시를 쓰려는데 비가 내린다. 미자는 한줄도 쓰지 못하고 미자의 공책은 빗물에 적는다. 시를 쓰려는데 풍경이 개입하고 난폭하게 치고 들어온다. 여기서 설명되지 않지만 미자는 뭔가를 느꼈을 것이고 강 노인을 찾아가 어떤 모종의 참혹한 의식 비슷한 것을 치른다. 그건 소녀의 죽음에 남아 있는 자로서 치르는 대속의식일 수도 있지만 이 참혹한 의식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작 소녀의 죽음은 어떤가. 그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망각되는 것이라고 해서, 무시되는 것이라고 해서 참혹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영화의 거의 종반부에 미자는 종욱과 배드민턴을 친다. 그들이 치는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미자가 그걸 건져내려고 할 때 카메라는 부감으로 내려다본다. 거의 유일한, 심판의 느낌을 주는 부감숏 속에서 종욱이 다가오고 형사들이 프레임인해 종욱을 부르고 종욱이 그들과 얘기를 한다. 미자가 간신히 라켓으로 가지를 쳐서 셔틀콕을 떨어뜨려 줍고 돌아서자 종욱 대신 박상태가 라켓을 들고 서 있다. 심판의 느낌은 다시 일상적 풍경에 녹아든다. 이 전이는 굉장하다. 마지막 장면의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예비하는 것이면서 심판, 단죄, 망각 이런 것들을 일상적 풍경에 겹쳐놓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가 낭송되는 장면이 있다. 미자가 결국 쓴 시, ‘아네스의 노래’라고 명명된 시가 선생인 김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미자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죽은 여중생 소녀의 목소리를 통해 화면에 들릴 때 시각적으로 보이는 숏들은 부재를 형상하는 풍경들이다. 미자의 텅 빈 집 내부, 아이들이 훌라후프를 하며 노는 아파트 앞 작은 공터(종욱은 이제 거기 없다.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다)), 미자에게 뭘 보냐고 묻던 할머니가 미자가 보던 나무를 보고 있는 모습 등이 비친다. 몇개의 이미지가 더 이어진 뒤에 지방 소도시의 일상적 풍경들이 다시 화면에 들어온다. 부재의 풍경은 다시 일상적인 것에 묻힌다. 그때 미자가 갔던 콘크리트 다리에 소녀가 프레임된다. 이것은 앞서 중반에 보인 할머니, 미자의 숏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유비관계를 이룬다. 일체를 향한 유비다. 강제적인 영화적 제스처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무섭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희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우리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가. 더 심상치 않은 것은 강가를 비추는 마지막 이미지다. 강물이 흘러내린다. 멀리서 보면 잔잔한 듯했던 물결은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다. 이때 풍경은 앞서 말한 대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침입하는 것 같다. 강물이 흐른다. 원래 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가온다. 거센 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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