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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에서 위협적 괴물로 탈태한다. <스플라이스>
김혜리 2010-06-30

인간의 귀 모양 연골 조직이 등에 돋아난 털 없는 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때 괴물은 쥐가 아니라 그 쥐를 만든 인간이라고 생각했는가?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스핑크스나 켄타우로스, 아누비스의 반인반수 이미지를 보며 동시에 솟는 매혹과 징그러움에 당황한 적이 있는가? 예전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영화가 가끔 그리운가? 그렇다면 <스플라이스>는 당신을 위한 영화다.

유전공학자 커플 엘사(사라 폴리)와 클라이브(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뉴스테드 제약회사를 위해 일한다. 둘은 난치병 치료를 위해 다양한 동물의 유전자를 합성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회사는 신종 단백질 특허에 만족하고 더이상 연구를 추진하기를 원치 않는다. 과학적 탐구심 혹은 명예와 부의 유혹에 끌린 엘사와 클라이브는 비밀리에 인간의 DNA를 기존 성과와 합성하고 배양한다. 실험의 결과로 태어난 ‘유전공학적 프랑켄슈타인’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 드렌(델핀 샤네크)이라는 이름을 얻고, 합성된 여러 동물의 특질과 더불어 인간다운 감정과 지성, 욕구와 공격성을 드러낸다. 애초 실험체로 영화에 등장한 드렌은 애완동물 같은 존재였다가 두 주인공의 ‘딸’이 되고 성적 대상으로 변모하더니 끝내는 위협적 괴물로 탈태한다. 이 과정에서 클라이브와 엘사의 야심과 혼란, 과거의 트라우마와 공포, 그리고 폭력을 수반한 종(種)이기주의가 드렌에게 투사된다.

데뷔작 <큐브>에서 1만4천개의 방으로 이뤄진 논리적 살인 미로를 설계하고, 도둑맞은 정체성을 뒤쫓는 <싸이퍼>로 필립 K. 딕풍의 참신한 스릴러를 선보였던 빈센조 나탈리는 흡사 착실한 엔지니어와 같은 감독이다. 과학적 지식을 진지하게 다루고, 상대적 저예산의 한계를 강력한 컨셉의 비주얼로 돌파하는 그의 미덕은 <스플라이스>에서도 여전하다. “어쨌거나 과학의 교만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식으로 설렁설렁 둘러대고 추격전에 몰두하는 방식은 빈센조 나탈리의 취향이 아니다. <스플라이스>의 플롯은 현대 생명공학이 직면한 이슈와 윤리적 문제를 조목조목 내러티브에 끌어들인다. 한편 꽃잎 모양의 눈동자, 캥거루를 닮은 다리, 전갈의 꼬리, 새와 같은 움직임을 결합한 피조물(creature) 드렌의 디자인은 그로테스크와 이상미, 괴물과 천사의 양극단을 하나의 육체에 깃들게 한 수작이다. 비슷한 캐릭터를 오직 섹시함으로 뭉친 여성의 모습으로 구현한 <스피시즈>보다 훨씬 세련된 상상력이다.

호러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영화치고 <스플라이스>의 폭력 함량은 아주 낮은 편이다. 대신 관객을 흔들어놓는 것은 정서적 공격이다. <스플라이스>가 야기하는 불안은 드렌과 클라이브, 엘사를 연결하며 고조되는 삼각관계에서 나오는 이율배반적인 두겹의 터부(taboo)에서 비롯된다. 그 하나는 부모 중 한쪽에 대한 성욕과 다른 한쪽에 대한 살해 욕구로 표현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이고 다른 하나는 이종과의 교접에 대한 금기다. 막판에 이르면 라이벌이 될 자식을 살해한 그리스 신화 속 크로노스의 이야기까지 겹친다. 몇몇 장면과 설정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제자들이 반길 만한 노골적 삽화다.

호러 장르 인증을 위한 무리수로 보이는 관습이 동원된 마지막 장에 눈을 감으면 <스플라이스>는 충격과 공포를 제공하는 데 족하지 않고 경이감의 영역까지 건드리는 데에 성공한 준작이다. 공동제작사로 이름을 올린 다크캐슬 엔터테인먼트는 <헌티드 힐> <13 고스트> <하우스 오브 왁스>에 이어 이 장르에서 견실한 필모그래피를 한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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