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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관성적 제스처에 묻혔어

시나리오의 날 선 퍼덕거림이 휘발된 <나쁜 놈이 더 잘 잔다>

권영철의 데뷔작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를 보고 좀 당황했다. 이 영화의 원안 시나리오가 2007년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지원 당선작이 될 때 필자는 심사위원이었다. 그 당시 시나리오가 주던 날것 그대로의 퍼덕거리는 느낌이 완성작에는 없었다. 이미 시효가 다한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스타일의 얽히고 꼬인 플롯대로 밀어붙이는 영화 같은 느낌만이 남았다. 대신 그런 유의 영화에 곧잘 끼어드는 블랙유머는 많이 탈색된 상태였다.

시나리오 상태에서 완성작으로 이어지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실상 이런 일은 영화 제작에서 비일비재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좀 유감이다. 날것 그대로의 캐릭터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장르영화의 관성적 제스처에 많이 묻혀버렸기 때문이다(이에 관해서는 759호 <씨네21> 프리뷰에서 정한석 기자가 이미 지적했다). 문제는 이게 영화를 더 재미있는 것으로 끌어냈느냐, 전형적인 것에서 취할 수 있는 공감의 에너지를 더 많이 끌어냈느냐 여부일 것이다. 어느 모로 봐도 <나쁜 놈이 더 잘 잔다>에서 등장인물들은 대중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은 아니다. 대다수가 잡놈들이며 좋게 말해도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 최악의 선택을 하는 인간들이다. 본받고 싶은 인물들이 아닐뿐더러 동정을 살 여지조차 없다. 아니, 그것조차 등장인물들 스스로 거부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태연자약하게 폼을 잡는 것은 또 뭔가. 그게 장르영화의 관성적 제스처와 구분되는 지점은 뭔가.

그나마 기이한 울림을 주는 캐릭터 묘사

바로 그 점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텍스트의 완결성, 좁혀 말해 세공력에서도 이 영화는 찍다 만 느낌, 감독의 말대로라면 예산 부족으로 알면서 못 찍고 넘어간 장면들이 상당수 보이는데도 겉치레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제스처를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에너지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원안 시나리오에 잠재적으로 스며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는 근래 일부 청춘영화가 보여준 내성적인 기운이 아예 없다. 성찰적이지만 착 가라앉아 있는 영화들, 예를 들면 노동석의 <마이 제너레이션>과 김삼력의 <아스라이>는 현실의 디테일을 충실히 보여주지만 끝내 등장인물들 내부의 발산하는 기운은 담아내지 않는다. 심지어 노동석의 두 번째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훨씬 기가 센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인데도 왠지 현실의 기운을 담아낸 것이라기보다 장르영화의 관습을 따르는 분위기가 더 강했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 역시 장르적 겉치레를 많이 걸친 작품이지만 등장인물들 누구에게도 딱히 공감을 주려는 연출 태도가 없고 그게 나름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내성적 기운이 전혀 없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는 위악적으로 밀어붙인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에는 악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들만 나온다. 김흥수가 연기하는 주인공 윤성이 접하는 인물들이 다 그렇다. 감옥에 간 채 남은 가족에게 빚만 잔뜩 지게 한 윤성의 아버지를 비롯해 연예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윤성의 여동생 해경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따지고 살기에 너무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가족을 대표해 빚 독촉에 시달리는 윤성은 말할 것도 없다. 사채업체로부터 오는 전화로 윤성의 일상은 거의 돌아버리기 직전이고 해경은 어떻게든 연예계와 줄을 대기 위해 몸이라도 팔 기세다. 이들은 악에 감염되기 쉬운 최적의 삶에 처해 있는 셈인데 이들의 주변 인물들은 사악한 환경에 완전히 적응한 인간들이다. 윤성의 친구인 종길과 영조, 그리고 종길이 직업적 관계를 맺고 있는 에로비디오 감독, 윤성 아버지의 도박 판돈을 가로챈 또 다른 사기꾼이 그들이다. 윤성은 도박빚을 갚으려다 이들과 자발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짐작할 수 있는 대로 풀려간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서로 각자 상대방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대각선으로 꼬이며 만나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만나고 만나야 할 상황에서 어긋나는 식이다.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 늘 그렇듯이 꽤 현실적인 듯 보이는 디테일이 뭔가 전형적인 장르적 관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한계가 앞서 말한 이 영화의 단점이지만 그 과정에서 캐릭터 묘사는 좀 색다른 구석이 있다. 영화 초반, 전복된 차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등장하는 윤성은 시종일관 눈알을 부라리는 모습을 일관하며 별다른 감정의 주름을 내비치지 않지만 일차원적으로 전개된 그 공격성이 영화의 끝에서 역시 피투성이가 된 채로 함께 차에 타고 있는 여동생 해경에게 뺨을 맞을 때는 기이한 울림을 준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는 자조적인 내레이션이 깔리는 끝장면에서 관객은 거꾸로 ‘이렇게 사는데 어쩔래?’라고 되묻는 듯한 감독의 호기를 느낀다.

다소 상투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그 결기를 끝까지 보존한 젊은 감독의 태도에 호감을 느낀다. 삼류 에로비디오 배우이자 해결사로 살아가는 윤성의 친구 종길이나 매니저를 사칭하는 영조도 끝까지 자신을 회의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 은행 강도를 하다 낙오된 윤성을 챙기지 않았다고 영조가 종길을 책망하는 장면이나 여동생을 납치했다는 거짓 협박을 아버지의 후배에게서 받고 번민하는 윤성의 모습이 드문 예지만 이 장면들에서도 그들의 마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윤성이 왜 그렇게 철부지 여동생에게 집착하는지도 잘 설명되지 않지만 오히려 이 영화의 거친 템포에는 그게 맞다는 생각도 든다.

인물의 악행이 더 극단적으로 치달았어야

요컨대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는 거두절미하고 등장인물들의 악행을 표면적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더라면 더 좋았을 영화다. 악행의 전시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그 디테일 가운데 등장인물들의 에너지와 빙 둘러 그들을 포위한 현실의 잔인함의 윤곽이 지금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졌을 것이다. 감독 권영철의 애초 연출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던 폭력적인 비전을 상당 부분 장르적 관성에 기대어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악인의 상은 대체로 영화에서 학습된 것이다. 거꾸로 제목에서부터 악인을 명시한 이 영화가 악인의 실체가 이런 것임을 구체적인 세부로 설득했더라면 영화는 좀더 굉장한 지점으로 올라섰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시나리오에 잠재적 가능성으로 놓여 있었던 것들이 어찌하여 상투형으로 눌려버렸는지 아쉬운 것이다.

이는 묘사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들의 칼질이나 섹스 행각에 관한 구체적인 사건 단위 말고도 거기서 나올 법한 심리적 긴장의 팽창과 이완, 그리고 그것의 폭발로서의 폭력이라는 정공법의 규칙이 이 영화에선 많이 허물어졌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혁신은 이 과정을 다르게 포장했다는 것인데, 장르적 클리셰의 긴 나열로 장면을 끌고 가는 척 속임수를 쓰면서 단말마적인 폭발로 응축하는 것으로 자기 영화의 서명을 꾸몄다. 그건 대결의 순간보다는 대결에 이르는 긴 대치의 순간들을 영화적 묘사의 클라이맥스로 삼았던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 스타일을 자기 식으로 변용한 것이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처럼 캐릭터 영화의 외관을 표방한 경우에는 악행의 전시라는 것이 사건의 고어적인 묘사보다는 사건의 전후 맥락에 있는 등장인물의 심리적 에너지를 어떻게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느냐가 관객을 압도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이는 단지 컷 수가 모자란다는 것만으로 변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연출의 접근법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쓰다 보니 좀 야박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는 개인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유형의 영화라고 말해야겠다. 뭉툭하고 불균질한 남성적 영화들의 제작이 어려운, 뺀질뺀질한 영화들이 대세인 상황에서 이런 영화가 나오고 연출자의 가능성을 봤다는 점에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건 비단 취향의 문제만이 아니다. 폭력적인 현실을 살면서 폭력의 맨 얼굴을 감히 들여다보려는 드문 시도를, 비록 미완이긴 하지만 이 영화가 어느 정도는 해내려고 한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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