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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다음 세대의 영화를 보았지

부천에서 만난 당돌한 영화 <불청객>

<불청객>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가운데 이응일 감독의 <불청객>은 관객을 가장 황당하게 만든 영화일 것이다. 영화제 프로그램 해설에 ‘놀라운 비주얼의 장편독립 SF판타지’라고 소개된 이 영화의 실체는 사실 장편독립 판타지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다. 2006년 무렵 자신이 거주하던 방에서, 함께 자취하는 사람들을 배우로 캐스팅해 촬영된 이 영화의 완성도는 홈무비에 가깝다. 그런데도 SF 장르라는 딱지를 감히 붙인 것은 이 영화가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 우드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상상력의 담대한 스케일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불청객>이 상영된 극장에는 감독의 가족을 비롯해 친인척이 대거 함께했는데 그들 상당수가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감사표시를 한, 곧 이 영화에 조금씩이라도 투자를 한 입장이었다. 당연히 포복절도하는 그들 일가친척 외에도 이 영화를 대하는 일반관객의 반응은 무척 우호적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얘기 전개에, 기상천외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시치미 뚝 떼고 관객을 압도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발굴 레이더가 아니면 포착되기 힘든 사례라 할 것이다.

변칙적인 유머와 황당무계한 시추에이션

<불청객>은 고시 준비를 하는 나이 든 남자와 그의 옆방에 사는 인생의 지각생들, 면접만 보면 떨어지는 취업준비생과 어딘가 모르게 사회성이 부족해 보이는 또 다른 고시 준비생의 추레한 오전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각자 서로 측은심과 경멸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이들 앞에 은하연방 론리스타 수명은행에서 온 포인트 맨이 나타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정체불명의 택배소포에서 튀어나온 그는 영어로 뭔가를 장황하게 지껄이는데, 사정인즉슨 지구의 나이든 엘리트들의 수명을 연장해주기 위해 루저들의 생명을 조금씩 앗아다가 적립해주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자취방의 세 남자에게 주문을 건 포인트 맨은 그들이 사는 자취집 건물을 우주 한복판으로 끌고 간다. 그리하여 이들은 망망대해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하기 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쓰게 된다.

물론, 당연히 <불청객>에는 CG 화면이 많이 들어 있다. 아마도 기술 스탭들의 헌신으로 만들어냈을 특수효과 화면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감독 이응일은 이 황당한 스토리로부터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어떤 현실을 메타포로 끌고 들어온다. 영화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는 론스타 사건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의 모티브를 빌려와 전체 영화의 얼개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영문도 모르고 자신이 다국적 기업의 착취구조에 끌려들어가는 상황을, 이 영화의 경우엔 우주적 기업의 착취구조로 뻥튀기해 보여준다. 그저 당장 먹고살 걱정과 하루 빨리 출세해 낙오자라는 손가락질을 면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던 주인공들은 실은 자신들이 어지간해서는 사회의 상류층으로 가는 사다리를 잡을 수 없고 어쩌면 영영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 때문에 다들 조금씩 맛이 간 상태다. 그들의 불안과 공포의 징후로서 우주에서 온 자칭 포인트 맨은 그들의 나른한 패배주의적 삶에 굉장한 스릴을 안겨준다.

아니, 그건 보는 사람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영화 속 당사자들은 나름 필사적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모두 일종의 갱생을 경험하는데, 그걸 보여주는 상황묘사는 당연히 정공법이 아니다. 일종의 변칙적인 유머와 황당무계한 시추에이션 코미디 스타일로 치닫는 <불청객>은 진지한 메타포를 자기반영적인 희롱의 잣대로 마구 들이민다. 어처구니없어서 재미있는 하나의 사건을 소개하자면, 우주를 배회할 때 주인공 중 한 사람이 리코더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는데 우주 어디에선가 같은 곡으로 화답하는 것이 들려온다. 창문을 열고 봤더니 그들 주인공처럼 정처없이 망망대해 우주를 떠도는 한 남녀 커플이 보인다. 그들은 주인공들 집쪽으로 소주병을 던지고 그 소주병 안에는 작금의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종의 매뉴얼이 들어 있다. 그들이 일제시대의 항일가처럼 불려진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리코더로 불며 은하계에서 소통할 때 객석에선 말 그대로 난리가 난다. 영화제에 오는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의 이런 식 유머에는 누구나 호감이 갈 것이다.

만만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태도

우연의 일치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날 낮에 역시 부천영화제 상영작으로 본 나카무라 요시히로의 일본영화 <골든 슬럼버>를 떠올렸다. 베스트셀러 작가 이사코 고타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 세대의 작가들이 곧잘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태도를 흥미롭게 반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예민하게 현실을 의식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들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가 스며 있는 이 영화는 일종의 스릴러 형식의 얼개를 취하면서도 재미의 동력은 철저하게 코미디에서 끌어내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아마도 개혁적이었을 젊은 총리의 암살범으로 느닷없이 지목된 주인공이 누명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대학 시절 함께했던 동아리 회원들과의 관계가 현재형과 과거형으로 번갈아 서술되는 구성의 이 영화는 부정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주인공들이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교직해놓았지만 어느 것에도 매달리지는 않는다.

비틀스가 해체 단계로 들어설 무렵 발표된 <<애비 로드>> 앨범에 수록된 짧은 곡 <골든 슬럼버>가 이 영화의 제목이자 주요 모티브로 쓰이고 있는 것도 신선하다. ‘황금빛 졸음’이란 뜻의 이 노래는 비틀스 멤버들이 서로 툭하면 싸울 때 어느 날 녹음하던 다른 멤버들이 다 자리를 뜬 가운데 혼자 남은 폴 매카트니가 만들었다는 것으로, 삶의 어떤 단계에 찾아온 감당할 수 없는 피로를 느끼며 고향의 휴식을 갈망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는 돌아가려 해도 갈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젊은 시절의 좋았던 순간을 이 노래가 상기시키지만 뜻밖에도 그 기저에 깔린 감정적 온도는 꽤 서늘하다. 절실하게 그리워한다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예를 들어 그때가 좋긴 했지만 다시 돌아가도 연인관계 같은 것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식의 태도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동의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이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만만하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족하다, 라는 세칭 쿨한 태도가 있는 것이다.

물론 <골든 슬럼버>와 <불청객>이 비슷한 정서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꾸 깨지기만 하는 현실에서 품게 되는 일종의 유희적 태도, 굳이 정색하지 않고도 그렇다면 내 맘대로 즐겨주겠다는 식의 태도가 약간 비슷하게 느껴졌다. 영화 만들기나 소설 쓰기나 근본적으로는 고통스런 창작행위지만 그 행위가 의식할 수밖에 없는 실제 현실에 대한 이런 태도에서 나는 다음 세대의 영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징후를 강하게 느낀다. 이응일 감독이 장차 어떤 입지를 갖게 될지는 전혀 모를 일이지만 여전히 전혀 받쳐주지 않는데도 궁극에 한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에 경외감을 느낀다. 이 시대에는 이런 재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창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은 생각했던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실현시키는 힘이라는 걸 실감한다.

<불청객>이 극장에 걸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불투명하다. 영화제 서킷을 벗어나 극장가에서 관객을 맞을 때 어떤 반응을 겪을지도 궁금하다. 한국의 극장 인프라는 이런 영화를 수용하기에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지만 이런 영화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 흐름은 고무적이다.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것도 즐기자고 하는 일이다. 즐거움과 고통의 변곡점에서 만들어낸 이응일의 기상천외한 창작품 <불청객>이 좀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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