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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갇힌 목소리'가 거슬리는 이유

제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내레이션의 역할을 생각하다

<오체투지 다이어리>

제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몇편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봤다. 이 영화제는 내 예상보다 근사했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서 열린다는 상징성과 메인극장인 씨너스 이채가 위치한 출판단지의 정갈한 분위기가 섞인 장소도 좋았고, 흥청망청대는 것 없이 영화 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영화제 프로그램의 질이 우수했다. 그중 내가 본 한국 다큐멘터리는 두편이었다. 두편 다 전업 감독이 아닌 저널리스트와 사회운동가가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제 개막 다음날 본 서세진의 <저 달이 차기 전에>는 쌍용차 옥쇄파업의 전말을 내부에서 촬영한 것인데, 내부자들의 곁에서 찍었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정서적 파장이 있다. 내부자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과 회의를 기록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는 바깥의 회사쪽과 정부의 세에 밀리는 약자의 패배와 희망을 담는다.

진보매체 <민중의 소리>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영상기자 출신의 서세진 감독은 당파적인 저널리즘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이런 유형의 작품은 많이 봐왔지만 비가 그치지 않는 눅눅한 날씨에 극장에서 <저 달이 차기 전에>를 보는 것은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켰다. 속이 꽉 막히고 분출되지 않는 분노 때문에 감정적으로 좀 힘들었다. 동시에 선악의 개념으로 구획될 수밖에 없는 이 싸움에 대한 정의에도 좀 물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영이 끝나고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남자 고등학생은 노동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반대편 입장을 알 수 있도록 찍었을 수는 없었냐고 감독에게 물었다. 이런 질문은 나이브하다. <조선일보> 사설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주류 목소리가 넘쳐나고 있는데 모른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 영화 속 노동자의 입장에 대해 뭔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면 그 뿌리가 바로 기왕의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반드시 선인가

필자는 <저 달이 차기 전에>에서 다른 것이 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깔리는 내레이션이 신경 쓰였다. 관객에게 상황의 개요를 알려주는 설명 기능을 하는 것 외에 대체로 이 내레이션은 정서적이다. 처음 예상과 달리 점차 극한으로 몰리는 노동자의 입장에 대한 공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공중파 텔레비전이나 주류 언론에서 담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노동자를 인간화한다. 그들의 목소리와 형체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 부분이 공장에 갇힌 노동자가 가족과 통화하거나 가족을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의 개인적인 입장과 사쪽의 일방적 통고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노조원으로서의 입장이 대비되면서 조금씩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이 된다. 영화 말미에 쳐들어오는 경찰과 사쪽의 용역에 쫓겨 패퇴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선 어쩔 수 없이 이 불행의 맛을 음미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도 얼마간 공식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패배하지만 언젠가는 승리하리라는 프로파간다의 옅은 그림자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 이 투쟁 대열에서 스스로 이탈한 많은 이들이 있다. 영화는 그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앞서 내레이션이 걸렸다고 한 것은, 이 장치가 영화가 관객에게 맥락화된 태도를 갖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태를 잘 모르는 관객에게 이 내레이션은 일차적으로 줄거리를 알려주는 기능을 하지만 일방적이며 다른 맥락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막는다. 영화가 끝난 뒤 사석에서 나눈 서세진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 속 노동자들이 그렇게 절박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바로 막장의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근무연차가 20년 넘으면 연봉 7천만원 이상을 받는, 중산층의 틀이 보장된 삶에서 곧바로 일용직으로 추락한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싸우게 만든다. 이 양극의 삶에서 연대의 흔적을 읽을 수는 없었다.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세력을 갖지 못한 그들의 비극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삐딱한 심보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선거 때 어떤 정파를 찍었을까 궁금했다. 사용자와 정부는 악이고 노동자는 선이라는 이분법만 읽히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다르게 맥락화할 수 있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이 영화의 내레이션이라는 장벽 앞에 막힌다. 소수자를 보호하자라는 메시지는 그 직전까지 소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생각 때문에 흐려진다.

영화가 입체적이라도 목소리가 수렴된다면…

지금종의 <오체투지 다이어리>도 흥미로운 영화였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오체투지순례에 동행한 이 영화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여준다. 오체투지가 무엇인지, 그것도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와 국도에서 오체투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중반에 아스팔트의 지열과 소음, 바람을 가르며 지나치는 차들 옆에서 오체투지하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일행을 보여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이들을 포위하고 거세게 밀어붙이는 듯이 보이는 기세는 이들이 행하는 오체투지순례의 의미와 상황을 시각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별다른 말도, 감정표시도 하지 않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뭔가 감정을 표시하는 방식은 대부분 유머다. 그에 반해 그들의 오체투지순례를 둘러싼 일반인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말도 안되는 논리로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에서부터 이들의 순례에 공감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이 영화에 반영되는데 그것이 곧 <오체투지 다이어리>의 주된 내용이라고 하겠다.

사회운동가이며 지난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던 지금종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 점을 말했다. 예민한 관객은 아마도 이 영화에 드러난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똑같은 상황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이처럼 다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소값을 떨어뜨렸다고 분개하는 촌로부터 예수의 수난과 같은 메타포를 읽어내는 가톨릭 신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반응이 이 영화에는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거기서 이 영화의 힘찬 목소리가 진동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목소리, 현실의 다종다기한 목소리가 이 두 순례자 일행을 감싸고 있다. 그 목소리들의 총합에서 이 순례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그것이 입체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매력을 이 영화는 지니고 있지만 역시 내레이션이 걸렸다. <저 달이 차기 전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상황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열려 있는 영화에 비해 닫혀 있고 다층적일 수 있는 목소리를 하나의 일방적 목소리로 가둔다.

꼭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레이션의 기능과 관련해 이 두편의 영화와 다른 느낌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다. 영화제 기간 동안에 본 <카지노 잭: 돈의 미합중국>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미국영화답게 얼마간 상업적이고 유머 넘치며 시니컬한 작품인데, 이 영화에도 당연히 내레이션이 나온다. 풍자적인 입장을 내세운 영화의 성격상 내레이션에는 감상이 끼어들 틈이 없고 내레이션의 톤은 객관적이며 중성적이며 약간 빈정거리는 투다. 이 영화는 공화당 실세를 끼고 전설적인 로비행각을 벌인 잭 아브라모프와 그 주변의 부패를 다룬 것인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말레이시아 총리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주선하고 돈을 챙긴다(백악관도 돈을 챙긴다. 나는 부시가 정상회담 대가로 돈을 챙긴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영화의 맥락 살리는 <카지노 잭…>의 목소리

영화의 결말에서 잭은 실형을 선고받는데 한국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어마어마한 범죄행각에도 불구하고 고작 2년 남짓 감옥에 갈 뿐이다. 그를 건드리는 것은 공화당, 민주당 의원을 망라한 지배블록의 돈 커넥션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청문회도 대충 소란스런 가십성 스캔들 수준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코멘트다. 출연자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잭이 희대의 악당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이어 영화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홈런을 날리는 <내츄럴>의 한 장면을 보여주며 해설한다. “사람들은 20%의 부자가 되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자신들이 현재 80%에 속해 있어도 언젠가 20%에 속할 수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부자들의 탐욕을 용인한다.” 결국 시스템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걸 이 영화는 건드리고 내레이션은 그 맥락을 축소하지 않는다. 다소 정서적인 톤으로 기우는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효과에 대해 우리도 생각해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