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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 앤 더 시티] 그녀의 LA 적응기
안현진(LA 통신원) 2010-10-08

수사물 <클로저>와 그 무대가 된 LA

“거대해요. 모든 것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어요. 날씨는 좋아요. 햇볕도 쨍쨍하고요. 전 괜찮아요…. 그냥 모든 사람들이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것, 그것뿐이에요.”=<클로저> 시즌1 에피소드1, 브렌다 리 존슨

2010년 한국의 여름은 기록에 남을 만한 맹염(猛炎)이었다. 2009년 “공부가 일보다 쉬울 거”라고 착각하고는 미국 하고도 LA로 떠났던 나는 하필 7, 8월 두달을 콕 집어 귀국했는데, 30년 가까이 한국에 살면서 한번도 겪은 적 없는 날씨의 습격을 ‘무더위+열대야+스콜+폭우+태풍’까지 5단콤보로 맞고야 말았다. 알코올 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던 여름밤을 지내며 내가 꿈꾸었던 단 한 가지는 LA의 청량한 저녁 바람이었다.

TV시리즈 <클로저>는 LA의 날씨를 이렇게 소개한다.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 낮이 아무리 더워도 밤에는 시원하다는 거야.” LA에서의 첫날 밤을 보내는 브렌다 리 존슨(키라 세즈윅)에게 FBI요원 프릿츠 하워드(존 테니)가 건네는 자상한 환영이다. 하지만 몇 시간 전 노모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미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은 브렌다가 이를 수긍했을 리 없다. 다음날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튄다. 차가 없으면 이동이 힘든 교통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다. 서부의 도시들이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LA는 규모에 비해 그 밀집도가 현저하게 낮다. 동서남북으로 길게 뻗은 고속도로는 설계도시로서의 위용을 뽐내지만, 도시 전역에 촘촘히 깔린 국도는 실용주의 외에는 고려하지 않은 듯 멋없다. 날씨라면 모를까, LA의 교통시스템을 (비보호 좌회전을 포함해서)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LA의 날씨는 하루 세 번 바뀐다

<클로저>는 미국의 케이블 채널 <TNT>에서 2005년 방영을 시작한 수사물로, 2010년 현재 시즌6이 방영 중이다. 주인공은 탁월한 심문기술을 이용해 사건을 종결시키기에 ‘클로저’(Closer)라는 별명을 얻은 중년 여성 수사관 브렌다 리 존슨. CIA에서 7년, 워싱턴 경찰국에서 4년, 그리고 애틀랜타 경찰국에서 3년 반 동안 일하며 명성을 얻은 브렌다가 LA 경찰서장이자 옛 연인인 윌 포프(J. K. 시몬스)에 의해 LA경찰국(LAPD) 주요 범죄수사국 국장으로 스카우트돼 LAPD에 전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진한 남부 억양과 올드한 패션감각으로 무장한 그녀는 ‘낙하산 인사’라는 불쾌한 의혹을 안고 출근한 첫날부터 부하직원들이 단체로 전출희망서를 제출하는 등 단단히 곤욕을 치른다. 사람보다 지치는 건 낯선 공간이 주는 불안감이다. 물리적으로 먼 근거지간 이동거리는 차치하더라도 스트리트, 애버뉴, 블라바드 등 차이를 알 수 없는 도로들 때문에 지도를 펼치고도 어디가 어딘지 짚어내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날씨까지 밉상이다. LA의 날씨는 하루 세번은 바뀐다. 꾸무룩한 오전,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쌀쌀한 저녁 등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브렌다는 지도를 읽는 방법을 배우고, 일교차에 따라 가벼운 겉옷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브렌다가 LA와 LAPD에 적응해가면서 동료들 역시 서서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렇게 <클로저>는 LA를 브렌다가 극복해야 하는 하나의 캐릭터로 부각했다. 사실 도시를 전면에 내세운 TV시리즈는 이전에도 많았다. <NYPD 블루> <보스턴 리걸> <CSI> 시리즈는 제목부터 배경이 될 도시를 지정하고 있다. <클로저> 역시 LA를 주무대로 삼고 있어 그 연장선 위에 놓이지만 통상적으로 전시하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섹스 앤 더 시티>가 뉴욕을 다룬 방식에 조금 더 가까울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어떤 TV시리즈도 <섹스 앤 더 시티>처럼 그 도시를 사랑할 수 없음이 분명하니 비교는 그만두자.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방영 중인 TV시리즈는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을 다룰 때 한층 정교해진 접근을 시작했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를 선호하던 과거와 비교하면 요즘은 미국 전역이 TV드라마에서 다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각각의 지방색은 단순히 보여지는 것 이상이 다층적으로 전달되고, 그 결과 이야기는 높은 수준의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다시 말해, 뉴욕의 스카이라인이나 자유의 여신상, 옐로캡이 도열한 맨해튼 시내를 촬영한 연결장면만으로는 시청자를 설득하기 어려워졌다. <클로저>의 경우 시즌1의 절반까지는 LA의 날씨나 교통, 거주자 등 ‘도시의 첫인상’을 활용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이 도시가 마주한 인종문제,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부동산 문제 등을 범죄와 연결해 다루고 있으며, 시즌이 더할수록 9·11 이후 불거진 안전성에 대한 미국의 과민한 태도나 공공윤리, 남녀차별, 동성애 등에 대해 LA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실상과 유사한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지역화라는 특성 외에도 <클로저>는 몇 가지 면에서 최근 미국 드라마에서 확인되는 주류 패턴에 들어맞는다. 우선, <클로저>는 심각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코믹한 터치를 잊지 않는다. 지난 세대의 수사물이 범죄 해결방식의 차별화에 집중해왔다면 새로운 세대의 수사물은 증거수집, 탐문, 심문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수사방식을 고수함으로써 팀워크나 등장인물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둘째로, 선 굵은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놓는 구조 역시 최근 미국 드라마가 좋아하는 방식 중 하나다. 홀리 헌터의 <세이빙 그레이스>, 에디 팔코의 <너스 재키>, 토니 콜레트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 줄리아나 마굴리즈의 <굿 와이프> 그리고 최근 방영을 시작한 로라 리니의 <The Big C>까지 최근 방송가는 원톱으로 드라마를 끌어갈 수 있는 실력있는 여배우 물색에 바빴다. 마지막으로 꼽을 점은 훌륭한 앙상블 캐스트다. 주요 범죄수사국 소속 팀원들은 시즌6이 만들어지는 동안 한결같이 여왕벌을 모시는 일벌들처럼 브렌다 주변을 맴돌며 사건의 종결을 도왔다. 미국 영화배우협회(SAG)가 해마다 주최하는 시상식의 앙상블캐스트 부문에 <클로저>가 4년 연속 후보로 지명됐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브렌다에게는 초콜릿이 있지

하지만 역시 브렌다 리 존슨이 없는 <클로저>는 상상하기 힘들다. “고마워용~ 정말 고마워용~.” 애교라고 하기에는 무서운 공치사로 장정들을 ‘입 안의 혀’처럼 부리는 브렌다는 심각한 워커홀릭이자 원칙주의자다. 이를테면 용의자의 집과 주차장이 별채로 분리된 경우 각각에 해당하는 영장이 없으면 수색하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하다. <클로저>의 에피소드는 주로 시신(들)이 발견된 현장에서 시작되는데, 브렌다는 다양한 이유로 짜증이 난 상태에서 현장에 도착한다. 오는 길을 헤매서일 수도 있고, 아침에 남편과 다투고 나왔을 수도 있다. 시즌6에서는 새로 입주한 LAPD 건물의 용도와 배치가 맘에 들지 않아서 평균 4회 이상 짜증나는 목소리로 “정말 고마워용”를 말하며 (거의) 울었다. 하지만 그 짜증과 고집, 독불장군 같은 심통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는 브렌다의 심문능력은 진정 최고다. 자백 직전까지 그녀는 천 가지 얼굴로 용의자를 어르고 달래는데 일단 자백을 받아내면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돌변해 정의를 수호하고 약자를 보살피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결이든 종결이든 사건을 마친 브렌다에게는 엄숙한 의식이 뒤따른다. 커다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닫는다. 심호흡을 하고 책상 서랍을 연다. 사탕류가 가득 든 서랍을 뒤져 은박포장이 된 ‘딩동’(초콜릿 과자)을 찾아내 한입 베어 물고는 눈을 감는다. 숭고하고 짜릿한 순간이다.

어느덧 시즌6이다 보니 브렌다에게는 LA가 익숙해졌겠지만, 고작 2년차인 나로서는 시즌1에서 어리바리했던 그녀와 나 자신이 겹쳐질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 스튜디오시티(할리우드 북쪽에 위치한 도시)에 갈 일이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자마자 “No Match”라는 메시지가 나왔을 때, 목적지 주변에 도착해서도 진입로를 찾지 못해 건물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야 했을 때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도록 무기력해졌지만 내게는 대신 운전해줄 부하직원도 짜증을 받아줄 남편도 없었다. 사탕서랍이라고 있었을까? 무심하고 한결같은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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