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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베니스, 시실리… 나만의 이탈리안 위크
김혜리 2010-10-15

제임스 모나코의 <지금,미국영화>중 <대부> 연작의 가족사진

9월17일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를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세명의 독신 여자가 어울려 불안과 실망을 주제로 명랑쾌활하게 떠들어댄 자리였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인생의 모서리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준 책으로 특별 언급됐다. 그러므로 이 책을 각색한 영화에 기대를 건 것은 내 잘못만은 아니다.

오늘 본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음이 동한 장면은, 이혼을 감행한 리즈(줄리아 로버츠)가 1년에 걸친 자아발견 여행 끝에 발리에서 좋아하게 된 남자가 프러포즈했을 때, “어떻게 찾은 마음의 균형인데 사랑으로 무너질까 두렵다”라고 뒷걸음질치는 대목이었다(일단 그 남자가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비현실성은 논외로 하자). 우리는 자주 불행보다 불안을 더한 고통으로 느끼고, 지극한 행복보다 평온을 원한다. 인류 다수가 빈곤과 독재와 폭력에 신음하는 세계에서 무슨 배부른 (여자의) 엄살이냐고 비난한다 해도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다시 말해 인물이 복잡모호한 욕망을 품는 건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면 나는 얼마든지 리즈의 변덕과 과민을 변호할 자세를 갖춘 관객이었다. 그러나 라이언 머피 감독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재미없는 키치(kitsch)의 본보기였다. 리즈의 ‘여행 테라피’는, 로마와 나폴리에서 삶을 만끽하는 법을 익히고, 인도에서 욕망을 버리는 기도를 배운 다음, 발리에서 균형을 발견하는 순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영화가 리즈가 애초 걷어내려고 했던 미망과 채우려고 한 결핍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 탓에, 관객은 새로운 만족이 무엇을 비워낸 자리에 들어섰는지 알 수 없으며 급기야는 만족의 정체도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영화는 이를테면, “그녀는 불행하다”라고 쓰는 대신 불행의 개별적 징후를 보여주어야 한다. 쓸모없는 물건을 잔뜩 사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일 잠만 자는 사람도 있으니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경우, 주인공 캐릭터를 여는 열쇠는 특유의 히스테리와 위트다. 자의식 과잉의 수다를 백분 살린 1인칭 문체야말로 원작이 성공한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크린에는 이국 음식을 먹고 이국 종교를 배우고 이국 남자와 데이트하는- “이제 더 나은 시나리오는 들어오지 않는 걸까”하는 투의- 울적한 표정을 한 줄리아 로버츠만 보인다. 대사의 단어와 뉘앙스를 뭉뚱그려 큰 뜻만 전하는 스타일의 자막도 사태를 악화시킨다.

9월18일

다시 생각해보니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감상은 “부럽다”가 첫째일 듯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도는 1년간의 완전한 휴식과 여행이라니! 하지만 여비는? 이듬해의 일거리는? 이론적으로는 간단한 도식이다. 1) 무조건 떠난다. 2) 돌아와 여행기를 쓴다. 3)나와 같은 여행을 꿈꾸는 독자들이 모두 사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4)줄리아 로버츠 주연으로 영화화된다. 참, 쉽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영화에 대한 일부 영화 글쟁이들의 부정적 평은 질투의 발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히 흥분하는 쪽은 이탈리아 기자들인데 50, 60년대풍의 상투적인 이탈리아 문화 묘사에 분노한 나머지 “왜, 만돌린도 넣으시죠?”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나머지 두 로케이션인 인도와 인도네시아 언론의 반응은 읽지 못했으나, 오늘날 관객은 외국영화가 자기네 나라를 그림 같은 낙원으로 묘사하면 사람 살 곳 못 되는 사회로 그릴 경우 못지않게 화를 내는 경향이 있긴 하다.

9월19일

참고 자료를 찾다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뒤적거렸다.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이 사랑하는 아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진영을 찾아와 누더기가 된 아들의 주검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밤에 매번 눈길이 붙들린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도록 열이틀 동안 전쟁을 멈추겠노라 약조한다. 늙은 왕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젊은 맹장은 헥토르의 손에 죽어간 친구와 멀리 있는 늙은 부친을 떠올리며 함께 운다. 그들의 눈물은 따로, 또 같이 흐른다. 영화에서도 한번쯤 보고 싶은 감정의 병치.

9월21일

철로에 기차가 지나가는 소음인 줄만 알고 눈을 떴더니 빗소리였다. 수건과 걸레를 그러모아 물 새는 창을 최대한 침착하게 틀어막고 <9월의 어느 날>(A Few Days in September)을 본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할 줄리엣 비노쉬의 2006년작이다. 전직 CIA 요원의 배다른 남매가 각각 프랑스와 미국에 떨어져 살다가 9·11 테러 직전 아버지(닉 놀테)의 갑작스런 연락으로 조우해 약속장소로 지정된 베니스로 떠난다.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이복남매의 애증 관계가 현대 세계를 빗대는 듯하다. 줄리엣 비노쉬는 아버지의 옛 친구이자 동료로서 남매의 안내자 역을 한다. 이건 진담인데 비노쉬는 얼굴로 연기하는 배우다. 어떤 계층과 성격의 여자로 분하건 그녀의 광대뼈가 드리우는 그늘은 숭고한 기운을 띤다. 주름을 겁내지 않는 파안대소는 영화에 즉각적인 온기를 불어넣는다. 키에슬로프스키와 키아로스타미가 그녀의 클로즈업을 영화의 대표 이미지로 선택한 건 이해할 만하다. 비노쉬는 카메라 앞에서 먹고 마시는 연기가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배우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대가 식탁에서 와인잔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을 보고 정을 뗄 수도 있지만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9월의 어느 날>에는 그것을 입증하는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가 있다.

만약 국제영화제에 갔는데 관람할 수 있는 영화의 편수가 한정돼 있다면, 개최 도시를 배경으로 촬영한 상영작부터 포기하기를 조심스럽게 권한다. 확률적으로 오직 그 이유만으로 초청된 영화도 많으니까.

9월25일

HD ONE 채널에서 <대부>를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금세기 들어서는 처음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최초의 강렬한 인상이 하나둘 구겨진 종이뭉치가 서서히 펴지듯 되살아난다. <대부>를 미숙한 관객이 충격으로 기억한 몇 가지 이유. 첫째, 마이클(알 파치노)이 경찰간부와 적대조직 보스를 살해한 다음, 영화가 시실리로 무대를 옮겼을 때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는 줄 알고 몹시 당황했다. 리듬, 미장센, 음악도 판이했을뿐더러 무엇보다 마이클이 케이(다이앤 키튼)를 그리워하는 어떤 조짐도 없이 시칠리아 아가씨와 결혼하는 광경에 순진한 소녀-나는 망연자실했다. 둘째, <대부>에는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 효과와 감정적 반응을 곱씹는 장면이 생략돼 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라는 그 태도가 차가워 움찔했다. 셋째, 말할 것도 없이 잘린 피투성이 말머리. 주인을 협박하기 위해 희생된 동물의 머리는 내게 공포의 원형적 이미지가 됐다. 특히, 뒷날 실제로 말을 죽였다는 사실을 듣고, <지옥의 묵시록>에서 다시 물소가 도살되는 장면을 보고 코폴라의 이름을 ‘악명’으로 깊이 새겼다. <더 셀>에서 말 한 마리가 순식간에 토막나는 이미지의 전율은 이 트라우마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넷째, 장르를 몰랐던 꼬마에게 <대부>는 도덕적 혼란을 안겼다. (“착한 편은 언제 나와, 엄마?”) 코폴라는 관객이 윤리적 딜레마 없이 콜레오네가와 동일시하도록 교묘히 관리한다. 미장센과 앵글은 면밀히 통제되고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는 눈에 뜨지 않는다. 상식적 도덕을 외로이 대변하는 케이는 줄곧 내몰리다 <대부2>에서 결국 콜레오네가를 떠날 것이다.

9월29일

일기를 다시 읽어보다. 전혀 뜻하지 않게 ‘나 홀로 이탈리아 주간’을 보냈음을 깨닫다.(트로이의 후예가 로마를 세웠다는 고대 서사시를 믿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