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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늙은 하녀의 혹독한 성장 일기

<하녀> La Nana

2009년/세바스티앙 실바/97분 1.78:1 아나모픽/DD 5.1, 2.0 스페인어/영어 자막/오실로스코프(미국)

< 화질 ★★★☆ 음질 ★★★☆ 부록 ★★☆ >

영화와 하녀(혹은 하인)의 관계는 대체로 전형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편이다. 대개의 영화들은 기껏 계급 갈등이나 성적 폭력을 주제로 삼았을 따름이다. 클로드 샤브롤, 김기영, 마르코 벨로치오, 조셉 로지, 루크레시아 마르텔 등의 영화에서조차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죄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었나.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식상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세바스티앙 실바의 <하녀>는 신선하다. 한 뿌리 두 가지인 장 르누아르의 <어느 하녀의 일기>나 루이스 브뉘엘의 <시골 하녀의 일기>에 빗댈 만한 걸작은 아니지만, 영화의 모호한 성격은 인물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혹자는 <남아 있는 나날>을 거론하기도 했다). 칠레 출신의 젊은 감독은 부르주아 가족과 하녀의 갈등, 지적 발육지체에 머물렀던 한 인간의 변화, 하녀가 넘쳐나는 고용시장의 비판 사이로 부지런히 오간다.

라켈의 41번째 생일날, 주인집 가족은 23년간 하녀로 일해온 그녀를 위해 파티를 준비한다. 머쓱한 표정으로 불려나온 그녀는 식탁 끝에 앉아 케이크를 먹는다. 라켈은 다정한 그들이 고맙다. 그들과 그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믿기에 라켈은 자신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긴다. 편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는 그녀의 건강을 염려해, 안주인은 새 하녀를 고용하기로 한다. 라켈이 침입자에 해당하는 새 하녀를 불쾌하게 대하자, 주인집 가족은 그녀의 엉뚱한 반응에 불편하면서도 딱히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다. 연이어 두명의 하녀가 자진해 자리를 내놓은 뒤, 쾌활하고 따뜻한 성품의 루시가 들어오면서 라켈은 서서히 변한다. 루시와 가깝게 지내며 도움을 받는 동안 라켈은 잃어버린 정체성을 발견한다. 라켈은 무표정한 얼굴이 무기인 음울한 여자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노동 탓에 외모는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과 주로 지낸 그녀가 ‘수동적 공격성’을 지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유치한 짓거리로 대화와 소통을 대신하는 그녀다. 할 애시비가 연출한 <챈스>의 현실 버전인 <하녀>는 인물이 길을 나서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마침내 밤길로 발걸음을 내딛기 전까지, 라켈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자를 방어하려고만 들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인생이 어쩌면 허상임을, 그리고 실제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이 녹록할 리 없다. 때때로 지옥의 고통을 겪는 라켈의 표정을 집요하게 포착한 끝에 <하녀>는 재생과 성숙의 기록을 완성한다.

그렇다면 <하녀>는 인간승리의 드라마인가. <하녀>는 감독 실바의 실제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라켈과 루시의 모델은 실바가 아는 두 하녀이며, 영화는 실바가 어린 시절을 보낸(그리고 그의 부모가 지금도 살고 있는) 집에서 촬영됐다. 극중 가톨릭계 상류층 가족은 하층민한테 절대 가혹하게 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층민의 고통엔 개입하지 않는다. 제대론 된 삶을 살지 못한 옛 하녀를 기억해내고, 영화로나마 그녀에게 새 삶을 안겨준 실바는 자기만큼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기실 실바의 자세는 ‘인간의 고귀한 사명과 실천’이라는 낭만적인 신념 아래 있다. 대다수 부르주아는 착취에서 비롯된 수혜의 삶을 누린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우아한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선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부르주아가 천상의 피조물임을 재확인하는 영화를 본 게 아닌지, 나는 의심하는 중이다. 미국의 신생 레이블인 오실로스코프가 출시한 <하녀>의 DVD는 메이킹필름(21분), 스토리보드와 장면 비교(3분), 사진 모음집을 부록으로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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