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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라디오 DJ와 연쇄살인마 스토커가 벌이는 대결 <심야의 FM>
송경원 2010-10-13

심야의 라디오는 방송이라기보다 사적 밀담에 가깝다. 인기 라디오 DJ와 연쇄살인마 스토커가 벌이는 2시간 동안의 대결을 박진감있게 그린 <심야의 FM>은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 남자를 통해 환상이 현실로 새어들어올 때의 일그러짐을 보여준다. 5년 동안 <심야의 영화음악실>이라는 라디오를 진행해온 DJ 고선영(수애)은 두딸의 엄마이자 의식있는 (적어도 그런 척하는) 아나운서다. 검찰을 향해 날선 클로징 멘트를 거침없이 날리는 그녀는 일견 사회비판적인 듯 보이지만, 길거리에서 여자를 패는 포주를 쓰레기라 부르면서도 쓸데없는 일에 엮이는 게 귀찮다며 외면한다. 팬들이 보내온 선물들을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녀에게 방송은 그저 일일 뿐이다. 일과 사생활을 철저히 구분하는 그녀가 말을 못하는 큰딸의 수술을 위해 마이크를 내려놓기로 결심하는 걸 보면 그녀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선영의 이런 은퇴를 용납하지 못하는 스토커 한동수(유지태)는 그녀의 가족을 인질로 붙잡고 마지막 방송을 악몽으로 바꿔버린다. 그녀가 과거에 했던 방송의 노래와 멘트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녀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어딘지 익숙하다. 한동수와 고선영의 관계는 <더 팬>과 겹쳐 보이고, 한동수의 근원은 <택시 드라이버>에 있으며, <볼륨을 높여라> <퐁네프의 연인들>의 대사도 곳곳에서 차용된다. 심지어 오프닝에서는 <택시 드라이버>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다. 결정적으로 질문과 죄의 추궁, 책임없이 내던진 말에 대한 단죄,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살인자의 숨겨진 사정과 같은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가 <올드보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동수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유지태 뒤로 여전히 <올드보이> 이우진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걸(심지어 죽음의 이미지마저 겹친다) 그의 탓으로 돌릴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단순히 다른 영화들의 짜깁기 이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라디오와 영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지점의 광기를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야의 FM>에서 영화는 라디오만큼 중요한 소재이자 숨겨진 사연으로 가는 핵심 통로다. 공개적이지만 동시에 은밀한 라디오의 속성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이 영화는 <심야의 영화음악실>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와 라디오라는 결합된 이중의 환상을 제공한다. 한동수는 일견 고선영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매달리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윤리적 기준을 영화에서 발견하고 라디오를 통해 허락받는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가 되기 위해 고선영의 말에서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것이다. 주어진 정보의 선택적 취사와 왜곡. 이것은 라디오의 치명적인 매력 중 하나이며 영화는 이 점을 십분 활용한다.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광기는 살인마 한동수만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드러난다. 이 영화의 가장 섬뜩한 장면은 피 묻은 몽둥이를 든 한동수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을 취재하려 달려드는 기자의 미소 띤 표정과 살인 중계 라디오를 재밌게 듣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심야의 FM>은 제한된 시간, 힘의 주도권을 쥔 자가 제시하는 불공정한 게임,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사건 등 스릴러영화에서 활용 가능한 여러 긴장의 공식을 정직하게 활용하며 차곡차곡 긴장감을 쌓아나가려 노력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 그것이 해결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해결 장치는 노골적이고, 해결에 이르는 과정은 단순하며, 숨겨진 이야기는 대수롭지 않다. 이중삼중으로 엮어놓은 설정들은 유기적으로 접합되지 못하고 그저 펼쳐져 있다. 결국 영화는 스릴러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잃어버리고 어느새 추격 활극으로 변모한다. 수애와 유지태의 연기 호흡은 나쁘지 않지만 이미 흩어져버린 긴장감을 메우기엔 아무래도 부족한 감이 있다. 그럼에도 <심야의 FM>의 재미가 크게 반감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 때문에 관객을 끝까지 따라오게 만드는 우직함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긴장은 뚝뚝 끊어져도 내러티브는 막힘없이 연결되고, 액션의 활력을 이끌어내는 연출의 리듬감 또한 나쁘지 않다. 다만 최근 벌어진 등급문제와 관련하여 자극적 화면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잔혹함은 <악마를 보았다>와는 분명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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