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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조금 더 현실적이야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이 참신한 김종관 감독의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통해 적지 않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김종관이 지금까지 본격적인 장편영화를 찍지 않았는데도 그 바닥에서 어느덧 구력이 붙은 감독이 된 것은 그가 꾸준히 찍어온 단편들의 완성도 덕분이다. 그는 늘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감독으로 독립영화계에서 대접받았다. 올해 부산영화제에 공개된 그의 장편 <조금만 더 가까이>의 시놉시스를 보니 5개의 에피소드를 묶은 옴니버스였다. 이 사람은 여전히 단편을 찍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영화매체를 둘러싼 편협한 조건하에 장편영화만이 대접받는 것은 부당하다. 단편영화를 잘 찍고 장편을 못 찍는다고 해서 재능의 우열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서둘러 보지 않은 것은 김종관 영화의 분위기, 문단으로 치면 일종의 문학청년 소설과 비슷한 톤의 느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춘이니, 사랑이니, 실연의 열병이니 하는 것들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다가오는 영화일 것이란 지레짐작이 있었다.

청춘영화에서 흔히 배제된 육체성까지 포섭

<조금만 더 가까이>는 물론 청춘의 남녀들을 다룬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헤어진 애인을 찾아 무작정 국제전화를 건 폴란드 남자와 통화하는, 한국의 어느 카페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그냥 그랬다. 폴란드 남자가 머물고 있다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풍광이 예쁜 화면으로 스쳐지나가지만 이것들도 이미 현재에는 CF에서도 남용되는 이미지와 비슷한 것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구조상으로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효서라는 이름의 여성은 맨 마지막 장면에 다시 나오는데 윤계상이 연기하는 현오라는 남자와 애인 사이인 것이 밝혀진다. 현오는 은희라는 여자와 헤어지고 새로 연애를 시작한 참이며 이 영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달라붙는 은희와 비오는 날 저녁 지겨운 스토킹 싸움을 벌인 뒤다. 효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느 실연당한 남자의 하소연을 들어줬고 현오는 헤어진 여자의 항의를 들어줬다.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다. 청춘의 사랑을 다루되, 시작하는 사랑뿐만 아니라 지나간 사랑의 회한이나 상실을 다룬 것은 새롭지 않지만 이 영화에는 좀 다른 시각이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게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남자 영수는 자신을 흠모하는 대학 후배 세연의 방문을 받고 어찌어찌하다 서투른 첫 관계를 치른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 여자의 수줍지만 조심스런 도발에 몸을 맡긴 영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성교에 집중하지 못하는데 이때 대담한 장면이 나온다. 남성의 체액이 등장하는 장면 정도라고 해두자. 과문한 탓인지 이런 묘사를 한국 장편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첫 장면의 말랑말랑한 분위기, 감상적인 소녀적 분위기를 대번에 일신한다. 클로즈업과 상반신 숏 정도에서 고정된, 들고찍기로 일관하는 이 장면의 연출에서 수줍은 눈빛과 망설이는 몸짓은 조심스런 사정행위로 이어지고 이 육체적 발산의 순간은 감정의 탐구와 병행하는 사랑의 관능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발산과 동시에 상대와 겹쳐지는 느낌, 이 장면은 책상에 기댄 여자의 손과 남자의 손을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윤계상과 정유미가 연기하는, 현오와 은희의 헤어진 연인들 사이의 치사한 승강이를 담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육체적 기억을 동반한 감정의 찌꺼기는 몽환적으로 찍힌 화면의 때깔과 대비된다. 은희는 비오는 날 기다리고 섰다가 다짜고짜 현오의 차에 올라타고 현오에게 강짜를 부린다. 늦은 저녁식사를 어느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때우면서 은희는 집요하게 그들이 사랑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시도하고 현오는 망연자실 그런 그녀를 대한다. 그들이 카페를 나와 낙엽 수북한 밤거리를 걸을 때 길가에 세워둔 차를 신경 쓰는 현오에게 쩨쩨하다고 흉보는 은희 역시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하는 쩨쩨한 여자인 것은 마찬가지다. 거리에서 마주친 어느 애완견을 귀여워하며 문득 일상적인 평소의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아마도 연기하는 것 같다.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자신의 상실감을 회복하는 데 맞춰져 있다. 현오에게 걸려오는 현재 애인의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던 그녀도 자신에게 전화가 오자 실은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고백한다. 이 대목에서 은희가 지겹게 되풀이하는 자기애의 표출 가운데 대화의 핵이 되는 것은 그들의 육체적 기억이다. 야한 속옷을 입었다며 보고 싶지 않냐고 은근슬쩍 떠보는 은희의 말에는 육체적 교접을 두고 벌인 남녀간의 전형적인 설렘과 익숙함과 권태의 여정, 사랑이라는 두루뭉술한 말에 숨겨진 관계의 여정이 배어 있다.

<조금만 더 가까이>는 청춘영화에서 흔히 배제된, 감상적인 낭만성을 우위에 두기 위해 제쳐놓은 육체성을 어떤 식으로든 환기시킨다. 소년 소녀의 감성이 아니라 청년의 감성으로, 어른의 육체성까지 포섭한 시각으로 사랑을 바라본 이 시도는 참신하다. 현오와 은희는 그들의 열정이 육체적 교접의 익숙함 끝에 꺼졌다는 것을 겉으로 내색하진 않지만 확인한다. 그럼으로써 이번에는 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으로 현오를 슬쩍 도발했던 은희는 현오가 반응하지 않자 결국 미련을 버린다.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세연과 막 시작한 이성애 사랑을 위해 사귀던 동성 애인 운철에게 결별통보를 하는 영수의 에피소드에서도 대화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들의 육체적 매력에 관한 것이다. 간접적인 완곡어법으로 이별을 통고하는 영수에게 화가 난 운철은 화를 내기 시작하면서 약간은 마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운철은 외설스런 말을 내뱉으며 동성인 자신과 이성인 영수의 새 애인을 비교하며 자신을 실추시킨다.

분량상으로 과도하게 늘어지는 감은 있으나 <조금만 더 가까이>는 이제까지의 사랑을 다룬 영화들에 비해 이런 측면에서 조금 더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사랑타령인 우리 시대의 과포장된 낭만주의는 실은 대중문화가 유포하는 환상의 신기루이기도 하다.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흔히 마음의 소통만을 다루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육체의 소통이다. 대개 이 부분을 대다수 영화는 감춘다. 그것만으로는 정상적으로 사랑을 다룬다고 하기 어렵다. 사랑의 감정과 병행하는 육체적 접촉에의 갈망 양태를 <조금만 더 가까이>는 몇 꺼풀 더 벗겨 보여준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인인 혜영과 주영은 남산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무심한 듯 지나가는 그들의 대화에는 기묘한 긴장이 있다. 얼마 전 헤어진 애인을 멀리서 본 직후 혜영은 뭔가 스산한 기분을 느끼는 듯한데 그런 혜영의 마음을 아는 척 모르는 척 주영은 혜영을 은근슬쩍 약올린다. 주영의 그 행동이 혜영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혜영의 우울을 반어법으로 위로하기 위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주영은 혜영에게 진지하지는 않다.

담담하게 지나치는 흐르는 삶의 유한성

어느 순간 요조가 연기하는 혜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때가 있는데, 장난스런 말로 점철된 주영과의 대화에서 혜영이 짜증을 내면서부터다. 설렘을 믿지 않으며 다른 얼굴로 시작하지만 늘 똑같은 얼굴로 끝난다는 사랑의 과정에 대해 더이상의 환상이 없다는 투로 말하는 혜영의 얼굴에는 놀라울 만큼 어른스런 기운이 풍긴다. 이 에피소드의 후반부에는 주영의 운동화 위에 떨어진 낙엽을 줍는 혜영과 그런 혜영의 머리에 떨어진 낙엽을 손가락으로 집는 주영의 모습이 나오는데, 닭살이 돋을 듯한 이런 묘사도 이 에피소드의 맥락에선 전혀 낯간지럽지 않다.

자신의 이름을 영화판에 알렸던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과 마찬가지로 김종관은 흐르는 삶의 유한성과 찰나의 행복을 과장하지 않으며, 고정될 수 없는 추억의 포장을 건드리기는 하지만 담담하게 지나친다.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성 속에 묻혀 흘러가는 이런 시각의 물리적 구체화는 섬세하고 아름답다. 사실상 직선적인 스토리 전개가 없고 포개지는 사랑의 이런저런 양태가 묘사되는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 흐르는 시간성이다. 김종관의 시간에 대한 연출감각은 탁월하고 또 다른 경지를 기대하게 한다. 다만 아직 그의 영화에 시가 없다는 것은 아쉽다. 그의 영화가 아름답긴 하지만 길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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