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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지진아들의 팍팍하고 힘겨운 삶의 행보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강원도 산기슭, 아버지를 도와 밭을 갈고, 소똥을 치우고, 그러면서도 연신 소를 팔아버리자고 불평을 해대는 시골 청년 선호(김영필). 알고 보면, 그는 대학까지 나왔고 시를 쓰고 있는 인텔리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40이 가까운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부모 밑에 얹혀서 살고 있는 고학력 백수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 몰래 팔아치우려고 소를 훔치듯 데리고 집을 나선다. 소는 쉽게 팔리지 않고, 도중에 옛 애인(공효진)에게 자기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는 전화까지 받은 선호는, 마음이 어지러워진다(그 옛 애인의 남편은 자신의 친구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 ‘여행’의 의미와 경로는 복잡해진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의 주인공 선호는, 그간의 임순례 영화 속 인물들(특히,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그들’)과 이렇게 저렇게 닮아 있는, 전형적인 임순례적 캐릭터로 보인다. 작은 꿈이 있지만, 세상은 그런 소박한 꿈을 꾸며 살아갈 여백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과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순응’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그들은, 일종의 착한 지진아들이다. 임순례는 그 착한 지진아들의 팍팍하고 힘겨운 삶의 행보를,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으면서, 딱 그들의 안쓰럽고 지쳐 있는 어깨만큼의 높이에서 지켜보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임순례의 영화는 어느 정도는 늘 ‘성장담’이자 ‘여행기’(로드무비)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버겁고 힘든 ‘성장-여행’의 느리고 더딘 발걸음에 보폭과 속도를 맞추며 따라가는, 진심어린 ‘동반’(同伴)이었다. 냉정하게 거리를 둔 ‘관찰’도, 그렇다고 주제 넘은 ‘개입’도 아닌 그 미묘한 거리 감각에서, 임순례 영화세계의 독특한 정서(분위기)와 아름다움이 나온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 두 가지 의미에서의 ‘풍경’이다.

첫 번째 ‘풍경’(風景). 강원도 산골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로드무비 구조를 띠는 이 영화에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풍경의 전시는, 일견 매우 ‘관습적’으로 보일 정도다(강원도의 산, 그리고 바닷가, 한국의 로드무비가 습관적으로 찾아가는 그 장소).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관습화된 낭만의 공간들이 그 자체의 전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진짜 풍경에 도달하기 위한 경유지나 배경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영화는 어느 순간 주인공 선호의 ‘마음속 풍경’으로 직접 들어간다(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이 ‘진풍경’은 그동안의 임순례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옛 애인의 전화 한통과 함께 선호가 빠져든 ‘마음속 지옥’. 이 영화에서 진짜 여행은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그 여행길을 이끄는 것은, 바로 두 번째 ‘풍경’(風磬)과 그 풍경을 달고 있는 ‘소’다. 물론 그 풍경과 소는 불교적 지혜 또는 윤리의 환유다. 이 ‘풍경을 워낭처럼 달고 있는 소’는 어떤 믿음이나 기적의 대상이 아니며, 선호의 마음속 고통을 대신해주지도 못한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온전히 선호 자신의 몫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는 그 지옥을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 ‘소’는 단지 그 여행길에 ‘함께’ 있을 뿐이며, 그 풍경-워낭소리는 주변에서 그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소’는 그 여행을 이끌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동반’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선호의 여행이 끝났을 때, 그와 ‘함께’ 다시 밭을 갈기 시작한다.

소와 선호의 관계는, 그간의 임순례 영화세계에서 카메라와 인물이 맺고 있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임순례의 ‘불교영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임순례는 줄곧 자신의 영화가 어떤 인물에게 ‘소’이고 ‘풍경’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 왔던 것은 아닐까? 성(聖)과 속(俗)의 상투적 이분법에 기대지 않는, 그리고 초월을 향한 의지의 과도한 현시나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는 고행(苦行)의 과장된 전시도 보여주지 않는 이 임순례식 ‘구도영화’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경이롭다. 무엇보다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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