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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저 밖의 괴물이 바로 나 자신이다

<심야의 FM>을 비롯한 2010년 한국 스릴러영화에 공통된 어떤 경향 혹은 불안의 잔영

<심아의 FM>

<심야의 FM>을 보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이는 단지 이 영화가 <택시 드라이버> <퐁네프의 연인들> <볼륨을 높여라> 등을 인용하거나, 좀더 넓은 맥락에서 <하이눈> <폰 부스>(러닝타임과 스토리 시간을 일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더 팬> <미저리>(광기어린 팬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히치콕의 죄의식 3부작인 <기차의 이방인> <로프> <나는 고백한다>(자신의 욕망을 다른 인물의 행동을 통해 돌려받는다는 점에서) 등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야의 FM>이 내게 불러일으킨 기시감은 이 작품 이전에 개봉했던 일련의 스릴러영화들, 특히 <용서는 없다>와 <파괴된 사나이>(더 넓게는 <평행이론> <악마를 보았다>) 등의 잔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심야의 FM>은 2010년 등장한 스릴러영화의 어떤 경향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 2010년 등장한 스릴러영화와 이 작품이 일란성의 관계를 갖는다면, 이는 이들 작품이 대중의 정서 구조(structure of feeling)라는 공통의 지반 위에서 잉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 공적 영역의 정체성을 심문받다

한동수(유지태)는 자신이 벌이는 사건이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끝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계획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한동수에게서 죽음 충동이 감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광기라는 면에서는 한동수가 한수 위지만, 우리는 이미 이러한 인물을 <용서는 없다>의 이성호(류승범)를 통해 경험했다. 이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될 게임에 프로타고니스트를 초대한다. 최근 한국 스릴러영화에서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악한이 프로타고니스트를 게임의 덫에 휘말리게 하는 대표적 방식은 ‘딸의 납치’다(<심야의 FM> <파괴된 사나이> <용서는 없다> <평행이론> <해결사> 등). 이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목숨을 걸고 지킬 만한 가치를 가족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 영화들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오직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것이 정치든, 방송이든, 종교든, 사법체계의 정의든, 그 무엇을 곁다리로 걸치든 간에 프로타고니스트에게 지상 최대의 유일한 가치는 가족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악한들이 프로타고니스트에게 제안하는 게임이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심야의 FM>에서 전직 앵커이자 라디오 DJ인 고선영(수애)에게 한동수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직업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커밍아웃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심야의 FM>에 한정되지 않는다. <파괴된 사나이>에서 목사, <악마를 보았다>의 국정원 요원, <용서는 없다>에서 부검 전문가, <평행이론>의 판사 등을 보라. 이들은 악한이 제안한 ‘거부할 수 없는 게임’에 휘말리고, 그 순간부터 그들은 ‘공적 영역의 정체성’이 심문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는다. 이들은 직업적 윤리와 고통스럽게 관계해야만 한다. 물론 게임에 휘말린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다. 각 영화의 결말이 무엇이든 간에, 그 누구도 자신의 공적 영역의 정체성을 과거처럼 유지할 수 없다. 목사는 타락하고, 앵커는 방송에 대한 신뢰를 버렸으며, 법의 담지자(부검 전문의와 판사 등)는 법의 금지 영역으로 치닫는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정체성, 또는 그들이 전력을 다해 매달리는 유일한 정체성은 누군가의 아빠고, 엄마고, 그리고 악혼자라는 사적 영역의 정체성이다. 즉 공적 영역의 정체성 위기는 사적 영역의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전이되어 사적 영역의 정체성에 몰두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영화에서 공적 영역의 (정체성) 붕괴와 사적 영역의 (정체성) 몰두는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심야의 FM>뿐만 아니라 <파괴된 사나이> <용서는 없다> 등은 공적 정체성과 관련한 질문을 던지는 척하지만, 프로타고니스트에게서 분출되는 파토스는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심야의 FM>에서 질문과 답은 비대칭적이다. 안타고니스트가 원하는 것은 가족의 파괴 자체가 아니었다. 한동수는 고선영의 공적 정체성을 심문하기 위해 가족을 인질로 삼았을 뿐이다. 한쪽은 가족을 수단화하고, 한쪽은 가족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비대칭이 정점을 이루는 장면은 거리에서 우연히 보았던 오빠와 여동생을 인질로 하는 게임에서다. 고선영에게 여자의 오빠를 죽이라는 한동수의 요구는 당신의 공적 정체성에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과연 고선영의 직업적 윤리의 딜레마와 관련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장면이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직업적 윤리와 무관하게, 다른 자를 죽여 내 딸을 살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딜레마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심야의 FM>을 통해, 또는 최근 한국 스릴러영화를 통해 이 시대 대중의 정서 구조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공적 영역의 위기가 사적 영역에 전이되어 그것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간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악마적 힘 앞에서 프로타고니스트가 제 아무리 전력을 다해도 자신의 사적 영역을 방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무대 위에 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불안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불안 때문에, 이들 영화는 가족이라는 환상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환상이야말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실재의 침입에 대해 우리 현실을 그나마 가치 있는 것으로 접근하게 해주는,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버팀목으로서, ‘상상의 작은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웅이 되지 못하고

<용서는 없다>와 <평행이론>의 프로타고니스트는 가족도, 자신의 목숨도 모두 잃는다. <파괴된 사나이>의 주영수(김명민)나 <심야의 FM>의 고선영은 그토록 원하던 딸을 되찾지만 봉합되지 않은 불안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악마를 보았다>에서 김수현(이병헌) 역시 자신의 목표를 이룬 순간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흐느낀다. 완전하게 봉합하는 데 실패한 인물의 불안은 이들 영화의 내러티브 경향에 의해 더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추격자>의 성공 이후 정착된 현상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 영화는 대체로 여러 용의자 속에서 진범을 위장하거나 은폐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최근의 스릴러영화는 영화 중반부 이전에 일찌감치 관객과 프로타고니스트에게 진범을 공개한다(<평행 이론>만이 범인을 끝까지 비밀로 유지하려는 예외적인 작품이다). 때문에 관객이 이들 영화에서 좀더 집중하게 되는 서사적 요소는 누가 범인인가, 하는 안타고니스트의 정체가 아니라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 또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프로타고니스트의 모습이다.

<심야의 FM>의 한동수는 부조리한 세상을 견뎌낼 수 없어 행동에 나섰음을 반복해서 밝힌다. 그는 밤만 되면 기어나오는 세상의 모든 쓰레기를 청소하려 했던 트래비스(또는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 옆으로 얼핏 보이던 비디오케이스의 주인공인 더티 하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영웅이 아닌 미치광이 사이코패스로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그것이 한동수가 패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용서는 없다>와 <악마를 보았다>에서 적절히 드러나듯, 악한들은 최소한의 목적을 이룬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로타고니스트의 고통을 판돈 삼아 게임을 즐기려 하기 때문이다. 한동수에게는 자신이 요구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리번거리지 않는 ‘기계적인 고집스러움’이 있다. 악한들의 이러한 태도는 나는 무언가를 요구하며, 끝까지 그것을 관철시킨다, 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이들이 표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각기 다르다 하더라도, 프로타고니스트에게 봉합되지 않는 어떤 불안과 공포로써 실재를 경험하도록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악한을 (승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패자라 말할 수는 없다. 반면에 이들 영화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완전한 패자로 전락하거나(<용서는 없다>), 패자는 아니더라도 승자가 아닌 상태에 머문다(<파괴된 사나이> <악마를 보았다> <심야의 FM>). 관객은 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봉합하기에 너무도 무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또는 그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지켜낸 가족이라는 환상 스크린을 통해 그 무능에 눈감아주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들 작품의 악한들을 ‘죽음 충동’의 구현물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 충동은 긴장이 부재하는 비유기체적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 혹은 자기 삭제에 대한 열망이라는 일반적 의미보다는 삶과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지속되는, 죽지 않은 채로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 달리 말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 주위를 ‘끊임없이’ 일주하려는 힘에 가깝다. 악한들의 죽음 이후에도 완전한 봉합이 불가능한 것 역시 이들이 영원히 지속하려는 죽음 충동의 구현물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이 영화들에서 사이코패스, 또는 그와 유사한 인물 유형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집착하는 목표에 고착된 채 그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려는 인물을 구축하려 할 때, 맹목적으로 무언가에 집착하는 사이코패스(또는 그와 유사한 광적인 인물)만큼 효과적인 인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다만 이러한 인물의 질감이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평행이론>

저 밖에 있는 괴물은 바로 나 자신

<심야의 FM>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한동수와 고선영이 종잇장 한장 차이라는 점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스토커와 순수한 팬의 관계를 그렇게 묘사하긴 하지만,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한동수와 고선영간의 근접성이다. 한동수는 고선영에게 반복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는 고선영의 입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한동수에게 고선영은 자신의 행동을 영웅으로 승인해주는 전능한 목소리의 담지자이자, ‘안다고 가정된 주체’인 셈이다. 한동수는 ‘오직’ 고선영의 목소리만을 원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위해 범행을 자행한다. 때문에 (고선영이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행위는 고선영과의 상징적 교환이라는 구조틀 속에 각인되고, 그럼으로써 그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어떤 책임을 떠맡게 된다. 이는 <로프>의 루퍼트 교수(제임스 스튜어트)와 학생간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루퍼트 교수의 강의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그에 화답하는 행동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태 말이다. 물론 <심야의 FM>은 (히치콕과 같은) 죄의식의 탐구로까지 나아가는 작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 이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죄의식을 떠안아야 하는 순간, 그와 안타고니스트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는 안타고니스트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죄의식의 주체는 오히려 프로타고니스트다.

그렇다면, 앞서 거론한 프로타고니스트가 느끼는 불안의 기저에는 저 밖에 있는 괴물이 바로 나 자신이다, 라는 사실, 또는 그것은 내 안에서 비롯된 괴물이다, 라는 죄의식이 공명하고 있는 셈이다. 꼭 그렇게 한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이러한 괴물을 하나의 알레고리로서 공적 영역에서 우리가 느끼는 어떤 실재적 위협(가령,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짓밟힐 것인가를 묻는 신자유쥬의의 광폭함)으로 인식한다 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타고니스트는 이러한 각성을 자신의 삶 속으로 통합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에게서 감지되는 것은 이를 위한 불완전한 방어의 몸짓이다. 가족은 괴물의 실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결국 이 영화들의 가장 솔직한 고백은, 그리 단단해 보이지 않는 가족(또는 사적 영역)의 버팀목 위로 질게 드리워진 불안의 잔영이 감지되는 순간이다.

안시환 몇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영화비평에 학위와 지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역사영화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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