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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류승완은 진화한다

투박하고 우직했던 한 감독의 영리한 변신 <부당거래>

어느덧 10년을 상회하게 된 이력에 비춰 류승완의 영화에 대한 안팎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왔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할 당시의 충격적인 신선함이 감퇴했다는 것이나, 감독의 취향이 너무 앞선 나머지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나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리>)처럼 키치의 미학을 섣불리 무기화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 듯하다. 다소 냉엄한 비판에 회부된 근작들에 이어 나온 <부당거래>가 류승완의 작가적 변화를 예시하는 이정표가 되리라는 촌평들이 많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부당거래>를 논하는 평자들의 시각은 대략 합의된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 영화가 류승완의 종래 작품과 완연히 다른 접근을 보인다는 것에 주목한다. 류승완의 전매특허라 할 액션이 눈에 띄게 자제되고 있으며, 장르에 대한 자의식을 완곡히 억누르고 있다는 것, 현실 세태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을 통해 시대의 징후를 드러낸다는 것 등으로 이야기가 모아진다.

<부당거래>에서 류승완이 이룬 괄목상대한 성취에 대해선 <씨네21> 778호 영화읽기를 통해 김영진이 소상히 분석한 바 있으나, 나는 그의 논의에 몇 가지 이야기를 보태고 싶다. 김영진은 류승완에게서 다소 늘어지거나 과잉되기 일쑤였던 스토리텔링의 리듬감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완벽히 성취되고 있으며 서사의 흐름이 막힘없이 풀리고 있다는 것, 할리우드의 장르 장인들마냥 장르의 외피 안에 현실을 적절히 용해시켜내고 있다는 점을 변화의 요체로 꼽는다. 여기에 부연한다면, 변화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부당거래>는 류승완이 즐겨 그려온 세계의 모습에 비춰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리키는 징후들을 내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르에 대한 풍요한 이해를 보여주는 하나의 분기점이다. 이 영화의 특이점은 강화된 계급적 시각으로 세상을 묘사할 수 있게 된 숙성된 현실인식과 대중의 욕망과 적절히 협상한 장르적 세련미에서 찾아진다. 투박하고 우직했던 류승완은 이 대목에서 놀라우리만치 영리해졌다.

하류인생을 벗어난 계급적 시각

<부당거래>에서 류승완이 그리는 세계의 모습은 다소 분열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부당거래>는 류승완이 좀처럼 다가가기를 기피했던 세계(자본과 권력을 쥔 기득권의 심부)를 서사적 갈등의 한축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그간 류승완의 영화에서 가진 자들의 세계는 축소되거나 아예 거세되어 있었다. 감독 자신이 하류인생의 삶에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류승완이 창조한 대결의 서사가 한국사회의 모순적 계급 구조에 대한 정치한 인식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터이다. 류승완의 영화에서 서사적 액션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건 쟁투인 적이 없었다.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간의 계급적 자존심을 건 투쟁이 아니라 누가 더하다 덜하다 할 수 없는 딱한 처지의 약자들이 살기 위해 인정을 버리고(<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우정을 팽개치는(<짝패>) 행태를 묘사하는 데 그는 주력해왔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하류인생들이 서로를 할퀴고 생채기를 내는 기이한 행태, 그 불운하고 애절한 삶에 촉촉한 연민을 던지는 것이 류승완이 세상을 그려온 방식이자 재현의 윤리였다.

냉혹한 조직 세계의 생리에 서툰 앳된 주인공의 참혹한 종말을 전경화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자멸적 어조나 완강한 폭력의 장력에 붙잡힌 채 죽일 듯 서로를 물어뜯는 개싸움으로 은유되는 <피도 눈물도 없이>의 비탄조 풍경, 빠져 나오기 힘든 불행의 사슬에 붙잡힌 두 주인공에게 거부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결정론의 성격을 부여한 <주먹이 운다>의 페이소스는 이렇게 반복되는 류승완식 운명론의 패턴을 고수한다.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안간힘을 써봤지만 불운한 숙명의 고리로부터 탈출이 어려운 잉여적 존재들의 다툼과 파멸의 이야기. 그러니까 류승완의 관심은 빈궁을 야기한 사회 구조가 아니라 비극적 운명과 그 운명에 조종되는,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는 부조리에 대한 탐구였던 셈이다. 물론 이들 영화에서 피력된 류승완의 세계관은 존중될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당거래>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어디에도 소용될 구석이 많지 않은 이런 하층민적 삶의 부박함과 애환으로부터 과감히 절연하려는 결의에 찬 의지가 읽힌다. <부당거래>에서 류승완은 그 처량했던 하층민적 삶의 존재론이 아니라 그러한 부조리와 모순을 잉태했고, 급기야 영구화하고야 마는 현재 한국사회의 분열과 혼란상에 대한 냉철한 인식론으로 방향을 튼다. 이 대목에서 류승완은 현실과 영화, 삶과 형식의 일치를 꾀하려는 성숙한 영화적 주체로서 거듭났다는 인상을 준다.

<부당거래>의 인물관계는 즉각적으로 이런 인상을 강화한다. 줄줄이 달린 경찰 후배들과 지리멸렬한 여동생 내외를 건사하는 데 뼛골이 빠질 지경인 광역수사대 에이스 최철기(황정민), 유력 기업가 김 회장을 스폰서로, 권력의 심부와 근거리에 있는 장인을 병풍으로 삼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젊은 검사 주양(류승범), 정글 같은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김 회장과 맞서보려는, 철기의 스폰서이자 조폭 출신 사업가 장석구(류해진)는 그간 류승완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인물형의 조합이다. 여기는 돈으로도, 사회적 지위로도, 배경으로도 내세울 게 없거나 사줄 것이라고는 마이너리티의 우두머리라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던 패자들만의 세계가 아니다. 결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하류인생들이기보다 그들은 황금과 명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그래서 약자들의 껍데기를 벗겨서라도 만인 앞에 군림하고 말리라는 아득한 욕망의 화신들이다. 그동안 류승완의 영화에 악인에 대한 완전무결한 징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에서 진정한 악인이 드물기 때문이다. 짐승에 진배없는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정재영)나 완악하기 이를 데 없는 <짝패>의 악당 필호(이범수)조차 어느 순간 동정적인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한 선언적 판단을 유보한 채, 류승완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적 비극의 파괴력과 그 불가해성 앞에서 누구도 응원할 수 없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자들의 불행을 지켜보도록 만든다. <부당거래>는 이 무참스러운 불행을 잉태한 현실의 질서와 구조를 표적으로 겨눔으로써 우리가 놓인 환경적 조건을 응시하도록 한다. <부당거래> 역시 세상은 정해진 게임의 법칙에 의해 굴러간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 거대한 게임의 법칙은 언제고 계속되리라는 비관의 전망이 우세한 영화이다. 강자와 약자로 선명하게 나뉘는 위계가 아니라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로, 포식자와 피식자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순환하는 사슬의 형상을 그려 보여준다. 요컨대 류승완의 이전 영화가 악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가혹한 운명의 포로로 다루었다면, <부당거래>는 운명의 포로처럼 보이는 자들에게 내재한 뿌리깊은 악을 들춰낸다.

그러므로 최철기와 주양은 거대한 사회악의 조종 아래서 불가항력적인 악행으로 이끌리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타락상은 어느 순간 환경적 요인을 초월해 전염된다. 심지어 저들을 위한 축제의 제단에 바쳐진 가여운 제물조차 결백한 희생양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당거래>는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이 악행의 고리에 입혀진 구조적 고질화의 예후를 진단하려 든다. 권력에 대한 추구이거나 개인의 안녕 또는 생존의 방편이거나 파멸로 이어지는 부정의 구조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부당거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을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횡행하는 협잡과 모사, 배신, 범죄는 정치인과 장사꾼의 유착, 검사와 경찰의 유착, 조폭과 경찰의 유착으로 그려진다. 이 악행의 공생관계에 대한 묘사는 각 인물들의 기구한 삶의 조건에 눈을 돌리게 하기보다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 아래 개인의 폭력을 감싸고 있는 더 큰 폭력의 구조를 어렴풋이 응시하게 만든다.

대한민국 주류사회에 깊이 밴 특권의식이나 습속을 파헤치려는 류승완의 의도는 <부당거래>가 장르와 맺는 관계에서 시사적이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부당거래>는 특정한 장르의 틀로 묶이기를 꺼리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류승완 자신은 ‘필름누아르’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지만 고도로 양식화된 스타일의 소여로서 그 장르의 특장에 견주어 <부당거래>의 시각적 긴장감은 다소 헐거운 데가 있다. 행여 이 영화에 강하게 작동하는 장르의 역학을 배제하려는 시선은 고전적 장르 규준의 재생이나 장르 컨벤션 위에서 벌이는 자족적 유희가 없다는 것에 주목하지만, 이런 입장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는 류승완의 욕망이 개연성과 핍진성, 리얼리티를 구비한 본격 장르 서사보다 장르가 즐겨 다루는 유습들에 대한 페티시즘과 자기 동일시적 충동에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다.

근자의 한국 장르영화들의 사정에 비추어 <부당거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술한 바대로 장르에 접근하는 데 있어 그동안 류승완이 고수한 태도는 페티시즘 혹은 자기 동일시에 가까웠다. 그는 장르의 규칙에 익숙할 뿐 아니라 자유자재로 그것을 요리하는 전문가의 태도(<피도 눈물도 없이>)를 취하거나, 장르 컨벤션을 자기식대로 전유하려는 의식적인 유희(<짝패> <다찌마와 리>)에 몰두했다. <부당거래>는 이런 태도로부터 떨어져 관객의 기대심리와의 긴장관계라는 보편적 장르 경제학을 따른다. <부당거래>는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한 현실 풍자 영화로서도 훌륭한 전범이 될 만하지만, 캐릭터 영화로서 그것을 읽을 때 한 백미(白眉)를 보여준다. 가까이는 이정범의 <아저씨>, 멀게는 강우석의 <공공의 적>으로 소급되는 세태영화의 계보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공의 적> 연작이 부려놓은 강인한 ‘캐릭터 영화’의 그것에 더 근접한 인상이다. 외견상 홀아비에 무일푼으로 인생을 허송하고 있는 듯 보이는 최철기에 비해 주양은 번지르르하고 비교적 순조로운 상승일로의 삶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사업가적 댄디함과는 거리가 먼 조폭 출신 장석구도 한데 섞이기 힘든 조합이다. 그러나 저들은 본질로는 다 같이 거룩함이나 인간미 같은 것과 거리가 먼 속인이다. 타협 혹은 거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세 주인공이 경합하는 이 승자가 없는 게임의 속되고 허망한 궤적은 특히 결말로 치달아가면서 매우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는 소아성애살해와 뿌리 깊은 기득권 세력의 유착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는 최종심적인 결론을 향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질기게 시달려온,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를 짐작하기 힘든 부정한 뒷거래의 커넥션을 소상히 재현시키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재현된 커넥션은 우리의 현실과 실체험 위에 포개지면서 모순으로 뒤죽박죽된 실제적 삶에 육중한 문답을 던진다.

캐릭터 영화로서의 장르적 성공

그런 의미에서 류승완은 영화의 색깔을 결정짓고, 작품 전체의 흐름을 준비하기 위해 영화의 오프닝을 매우 강렬한 필치로 연출하고 있다. 한국사회를 혼란과 망집으로 몰아넣고 있는 소아연쇄살해에 대한 뉴스 화면을 경유해 범인으로 오인된 사내의 죽음이 이어지며, 신문을 펼쳐들고 줄지어 이동하는 형사들의 심각한 모습이 화면을 채운다. 시대의 모순과 질곡을 제시하려는 의도 위에 서 있는 <부당거래>의 장르적 색깔은 이 한 장면에서 예시된다. 여기서 ‘장르적’이라는 말에 주석을 단다면, 현실세계를 장르화하는 나름의 관습에 대해 관객이 가진 기대심리와의 겨루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많은 평자들의 지적처럼 <부당거래>에서 물리적인 액션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파괴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액션이 하나의 장르이기보다 표현의 양식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류승완의 전작들에서 액션은 표현의 수단이기에 앞서 물신화의 대상처럼 보였다. 물론 거기에도 쾌락은 있다. 류승완은 여기서 관객이 누차 경험하여 체득한 바 있는 세태영화의 관습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캐릭터의 매력과 순도를 최상급으로 올려놓는다. <부당거래>에서 류승완이 제시한 쾌감은 캐릭터와 그들의 격렬한 심리적 액션에서 기인한다. 이는 2010년을 풍미한 한국영화의 한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고 느끼는 바, <이끼> <아저씨> <해결사>로 이어지는 세계의 각박한 풍조나 뜻하지 않게 우리의 삶을 급습하는 부정한 세태에 대한 다기한 인간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윤리적인 범주나 개념으로 쉽사리 환원되지 않는 특수한 경험의 뒤섞임 속에서 인간 현실을 발견하려 했던 이전 영화들과 달리 <부당거래>는 현실을 구성적이고 서사적인 맥락으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 세계에 대한 정상적 관념을 고의로 위반하거나 경험적 진실을 소외시키지 않고 장르의 관성 안에 녹여낸 캐릭터 드라마로서 <부당거래>는 거치나마 10년을 넘긴 류승완 영화의 한 꼭지점이며, 이 재능만만한 중견감독이 갈 길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승완의 영화는 여전히 다난한 변화의 도정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부당거래>가 입증한 풍성한 이야기의 깊이와 다양한 삶의 결을 꼼꼼히 더듬어 관객의 욕망과 협상하는 힘을 잃지 않고 여하히 그 두께를 더해갈 것인가가 향후 류승완의 문제일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프로그래머. 재는 것 없이 원껏 써보라는 <씨네21> 편집진의 주문을 따라볼 생각이다. 한편의 영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보다 좁은 주제로 깊게 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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