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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카메라가 다가오자 사랑이 멀어졌다
김혜리 2010-12-10

스웨덴판 <렛미인>의 오스칼을 연상시키는, 덴마크 화가 크리스틴 콥커(Christen Kobke)의 초상화 <앉아 있는 소년>(1832). 벌거벗은 소년은 빛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

*<렛미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1월9일

늦은 오후, 멀티플렉스에서 성황리에 <부당거래>를 관람하고 나오는데, 어딘지 낯익은 미남 청년이 커피전문점 바깥 테이블에 홀로 앉아 독서 중이다. 다가가보니, 삼남매를 슬하에 두고 일곱편의 장편영화를 만드신 류승완 감독님이다. 아니, 이 광활한 도시에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아프간>을 읽을 장소가 <부당거래> 관객이 쏟아져 나오는 길목의 카페 테이블뿐이란 말인가요, 라고 짐짓 놀려드린 다음 잠시 동석했다. <부당거래>의 경험 이후, 류승완 감독은 본인이 정말 잘할 수 있는 작업, 현장에서 스스로 즐거운 영화 만들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세트 피스(set piece)로 안무된 액션에 관한 그의 오랜 열광을 입에 올렸더니, 류승완 감독의 말에 희미한 회고조가 어렸다. “내게 최고의 액션은 여전히 성룡 액션이에요. 내 영화에서도 그런 액션을 재연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제 알아요. 그건 성룡 외에는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액션이라는 걸. 최근에는 ‘본’ 시리즈처럼, 현실을 가지고 다른 종류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액션에 관심이 가요.” 머릿속에 완벽한 상상도를 품고 거기 닿으려고 악전고투하는 연출에 지친 류승완 감독은 현장의 조건과 변수에 반응하고 협상해 궁극적으로 한편의 영화로 어우러질 판단들을 매일 내리는 연출 방식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에너지를 얻었나보다. 요컨대 조금 더 유연하고 사적으로 조금 덜 불행한 작업이랄까.

11월10일

생각할수록 <부당거래>는 교훈적이다. 몸을 팔자고 한번 작정하면 남는 건 흥정뿐이고, 훼절을 시작하면 적당한 지점에서 유턴할 길 따위는 없으니 당신이 재벌 사위거나 검사가 아닌 한 부당한 거래엔 섣불리 가담 않는 게 현명하다고 딱 잘라 경고하는 셈 아닌가. 검사 주양(류승범)과 형사 최철기(황정민) 진영의 대결 플롯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약점잡기로 엎치락뒤치락하는데 고비마다 온갖 디지털 기기가 동원된다. 이 영화에서 사람이 너무 쉽게 죽어나간다는 지적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처럼 ‘기록’을 막을 수 없는 세계에서는 증거가 계속 덜미를 잡기 마련이니 진실을 묵살할 힘이 있거나 상대를 죽여 없애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터다. 주먹으로 치고받는 대신, 덮으려고 막무가내로 엉겨붙거나 체중을 버티는 다리 둥치 아래쪽을 걷어차 단번에 거꾸러뜨리는 액션 스타일도 영화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 즉 <부당거래>의 액션에는 싸움의 기술을 전시하는 기능이 없다. 힘의 작용방향을 보여주는 걸로 족한 것이다.

곱씹어보면 <부당거래>는 최철기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될 운명이었다. 알고보면 주요 인물이 모두 같은 추악한 기계의 부속이긴 하나, 적어도 최철기는 가족과 동료를 보호하겠다는 수세적 동기에서 출발해 결국 자멸하는 인물이란 면에서 주인공의 시점을 차지할 만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사생결단>의 구도를 연상시키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보이는 건 류승범의 연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연기는 <부당거래>에서 서사 밖으로 튀어나올락말락하는 아슬아슬한 줄을 탄다.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을 운운하는 농담은 마치 그가 이 영화에서 코미디를 담당하고 있나 싶어 위태롭고, 황정민이 온전히 지배해야 하는 결정적 신에서조차 쉽사리 수굿해지지 않는 그의 존재감은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트집을 잡기엔 류승범을 구경하는 재미가 너무나 크다. 반무테 안경에 골프웨어를 입고 검찰청 복도를 유유자적하게 미끄러져가는 류승범이라니! 이제 류승범은 뭔가를 남보다 많이 누려보고 놀아본 남자, 그로 인해 기름기가 낀 인간까지 연기할 수 있게 됐다. 그런가하면 비슷한 시기에 촬영한 <페스티발>에서 류승범은 더없이 담백하고 로맨틱하다. 웃기지 않고도 여자를 충분히 반하게 하는 남자다. 길게 늘어놓았지만 짧게 말해서 배우 류승범에게 다시 감전됐다는 이야기다. 한번의 매혹으로 경력 내내 팬을 끌어가는 배우도 대단하지만, 거듭 다른 사랑에 빠뜨리는 배우도 괴물이다.

11월19일

맷 리브스 감독의 <렛미인>만큼, 보는 동안 마음이 사분오열된 영화도 없었다. 장면마다 욘 A. 린드크비스트의 원작 소설과 앞서 만들어진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의 <렛미인>을 끄집어내어, 무엇이 달라졌는지 왜 달라야 했는지 번민하기가 고단했다. 밤새 내린 순백의 눈밭을 밟듯, 이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처음 조우하는 관객을 질투했다. <렛미인>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메모의 일부.

0. 미국판은 스웨덴판보다 오웬과 애비의 사랑 이야기에 깔린 10대의 섹슈얼리티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호평 받고 있다. 확실히 미국판의 크로 모레츠는 스웨덴판의 리나 레안데르손보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 나왔던 커스틴 던스트를 닮았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내게 <렛미인>의 정수는 그것이 다름 아닌 사춘기 이전의 러브스토리라는 점에 있었다(섹슈얼리티에 관한 뱀파이어 영화가 더 필요한가?). 다시 말해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의 소년과 거세된 소년/노인의 관계, 인간과 사람인지 괴물인지 가릴 수 없는 존재의 포옹이라는 점이 <렛미인>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원작 소설과 스웨덴영화는, 성애가 형성되기 이전에 그 원형질이 되는 충동과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살아 숨쉬는 모든 존재에 내재된 사랑의 본능을 그렸기에 특별했다. 좀더 대담하게 말하자면 앞선 두 판본은 무성애자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런 점에서 <렛미인>의 러브스토리가 발휘하는 마력은 <A.I.>의 그것과 연결해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1. 리브스 감독은 주변 인물을 축소하고 오웬과 애비에게 집중했다. <클로버필드>의 감독답게 스웨덴판의 싸늘한 롱숏을 능수능란한 주관적 숏으로 대체해 내부자의 시선을 전달한다. 한데 바짝 다가든 형식에도 불구하고 미국판 <렛미인>에서 오웬과 애비의 이야기는 대상화돼 있다. 첫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수사관의 시점으로 서사를 테두리짓는 도입 장면부터 ‘정상사회’의 시선은 영화 밖에서 내내 두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 안개처럼 그저 서려 있던 규명할 수 없는 소년의 충동과 폭력성에는 부모의 무관심, 성적 눈뜸과 같은 선명한 인과가 부여된다. 누굴 위해서? 보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가 배려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장면. 스웨덴판 <렛미인>에서 오스칼과 이엘리가 벗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은 당초 할리우드판이 어떻게 다룰지 관심을 모았다. 간단한 대답. 할리우드는 오웬에게 옷을 입혔다. 그러나 정작 거슬렸던 것은, 애비가 오웬의 등을 보고 나누는 대화를 찍는 카메라의 자리였다. 맷 리브스는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비밀스런 이 대화신의 콘티에 오웬과 애비 사이에 카메라가 끼어들어야만 가능한 숏을 넣었다. 순간 소중한 영역이 침해당한 기분이 들었다.

2. 일부 팬들은 미국판 <렛미인>이 애비를 돌보다가 희생되는 중년 남자를 미래 오웬의 모습으로 암시했다고 하여 분개하는 모양이다. 오웬만큼은 애비에게 이용되는 노예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렛미인>은 사랑의 숭고함이 아니라 불가피성을 말하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대도” 편들 수밖에 없고 심지어 “나를 도끼로 찍어 죽인대도 떠나지 못하는” 감정에 관한 문제다. 오스칼/오웬을 다시 보라. 이 소년이 마냥 선하고 감상적인 희생자로 보이는가? 그는 커서 연쇄살인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은 이 이야기를 버릴 건가?

11월21일

간신히 몸이 잠길까 말까 한 얕은 잠 속에서, 누군가 작은 손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엘리? 애비? 눈도 못 뜨고 비틀비틀 창문을 열어보니 여름으로부터 뒤늦게 도착한 듯 세찬 소낙비다. 하마터면 “들어와도 돼”라고 말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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